경남 함양에서의 문화재 답사길에서,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인,

조선 초기의 정자 문화재 "교수정(敎授亭)"을 찾았습니다. 

 

교수정(敎授亭)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으로,

 

 

 

솟을 대문이 가로막고 있으나 알림 현수막과 함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마음먹고 시간을 내어 먼길을 달려온 문화재 탐방길에서 수시로 겪어보는 경우가,

대부분 외진곳에 자리한 정자 또는 고택등의 문화재를 찾지만 문중의 관리라는 이유로 문이 굳게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만 기웃거리다가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수막까지 걸어두며 개방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믄일이 아닐수 없어,

함양의 조씨(趙氏) 문중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집니다.

 

 

 

교수정(敎授亭) 권역으로 들어가는 첫문에서는 숭경문(崇敬門)의 현판을 볼수가 있고,

 

 

 

솟을대문인 숭경문(崇敬門)을 들어서면 건물이 보이고,

 

 

 

마당의 왼쪽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2개의 비가 자리해 있는데, 

이곳을 가꾸고 정비한후 세워둔 기념비로 여겨집니다.

 

 

 

 

처음 만나는 건물은 수성당(修誠堂)으로 강당의 역활을하는 건물입니다.

 

 

 

수성당(修誠堂)의 현판이며,

 

 

 

수성당(修誠堂) 바로 뒤에는 사당인 덕곡사(德谷祠)가 자리해 있습니다.

 

 

 

덕곡사(德谷祠)의 현판으로,

이곳은 두문동 72현 중 한사람인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을 모신 사당 입니다.

 

 

 

사당인 덕곡사(德谷祠) 뒤편에는,

낮은 언덕으로 오르는 돌계단 위에 교수정(敎授亭)의 모습이 보이고,

 

 

 

돌계단 오른쪽에는 고려충신조선생백세청풍비(高麗忠臣趙先生百世淸風碑)의 비석과,

 

 

 

비석 뒤편에는 비각이 자리해 있어,

 

 

 

비각의 내부에는,

조씨(趙氏) 5효자의 정려(旌閭)가 세워져 있습니다.

 

 

돌계단을 올라 협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1357∼1417)이,

고향으로 돌아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태조 7년(1398)에 지은 정자인 교수정(敎授亭)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구조 입니다.

 

 

 

교수정(敎授亭)의 현판이며..

 

 

 

두개의 단을 통하여 교수정(敎授亭)으로 올라 봅니다.

윗단 중앙에 자리잡고 물룩 튀어오른 팔각으로 보이는 돌이 올라 있어 용도가 궁굼 하지만 알수 없습니다.

 

 

 

교수정(敎授亭)의 마루에서는 수많은 주련의 모습을 볼수가 있고,

 

 

 

두칸 규모의 방문 위에는 미국(薇菊)의 현판을 볼수가 있어,

정자의 주인인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의 충직함과 굳은 절개를 의미하는 "고사리와 국화"라는 뜻입니다.

 

 

 

교수정(敎授亭)의 마루에서 볼수있는 편액들로,

조선초기에 세웠던 정자 여서인지 중건기, 중수기의 편액들이 많이 보입니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1357∼1417)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함안으로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덕곡(德谷)이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 입니다.

우왕2년(1376)에 진사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에 사마시 문과에 합격하여 저작랑이 되었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때 명나라 초대 황제인 태조 홍무제가 선생의 굳은 의지와 높은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자금어대를 하사하여,

중국에서도 널리 명성이 알려졌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담한 크기의 두칸 방의 안쪽을 들여다 봅니다.

 

 

 

마루에서 보이는 담장너머의 모습으로,

노송들이 교수정(敎授亭) 주변을 둘러싸듯 자리해 있고,

너머로 남강을 항하여 내려가는 지곡천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마루에서 내려와 교수정(敎授亭)의 뒷마당도 들여다 보고..

 

 

 

정자의 담장 너머로 내려가는 지곡천과 주변의 모습이 보입니다.

 

 

 

지곡천의 윗쪽으로 덕암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인 대진 고속도로가 가로지르듯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자의 반대쪽 협문을 나오면 비석이 서있어,

태조 7년 조승숙(趙承肅)이 향리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면서 교수정을 짓고 후진 양성을 하였는데 왕이 불러도 출사하지 아니하므로,

왕이 침향궤(沈香軌)를 보내면서 "너의 성품이 강직하기가 마치 이 물건과 비슷하므로 글씨를 새겨 주노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은 이색(李穡)·길재(吉再) 등과 도의로 친교를 맺고,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특히 길재와 함께 수창한 시는 유명합니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사람인 그를,

성종(1469∼1494)은 선생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유호인(兪好仁)으로 하여금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게 하는 사제문을 내렸는데,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 이라는 여덟자를 자연 암반 위에 새겨 거북 머리를 조각하고 비를 세웠는데,

비의 높이는 320㎝·폭 90㎝·두께 39㎝입니다.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의 뜻은 고대 중국 은나라 제후국인 고죽국의 백이 숙제(伯夷 叔齊) 형제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제후자리도 서로 양보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무왕이 은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자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않겠다는 의지로,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는데 덕곡(德谷)의 충절이 이와 같다는 의미 입니다.

 

 

 

비석옆의 바위에도 글자가 암각되어 있어 들여다 봅니다.

 

 

 

뒷 글자가 희미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교수대(敎授臺)의 글씨가 보이며,

암각된 바위위에는 일부터 파눈듯한 홈들이 있어 별자리인 북두칠성을 의미하며,

아래로 흐르는 지곡천을 은하수로 삼아 우주를 표현해 두었다고 하니 옛사람들의 정취가 부럽기만 합니다.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이 석대위에 정자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쳐,

후인들이 교수대(敎授臺)와 교수정(敎授亭)이라 이름지어지게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정자의 주인에 의해서 현판이 올려지는경우에 비해 특이합니다.

인근지역에는 한원당 김괸필과 더불어 양대산맥이라 할수있는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 있어 함께 돌아볼만한 곳으로,

충절의 정자인 함양의 교수정(敎授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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