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은예와 덕을 숭상한 땅이란 이름의 예덕(禮德)으로 불리기도 하였다는데,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찾으며 곁에있는  보부상의 중심이라는  예산의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의,

"상무사(商務社) 보부상 유품전시관"을 찾았습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1길 6의 충의사 입구에 있는 보부상 유품전시관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승이 보입니다.

 

 

 

입구의 장승을 기점으로 곧바로 들어가면 윤봉길 기념관으로 들어갈수 있고..

 

 

 

장승 오른편에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보부상 유품전시관이 자리해 있습니다.

 

 

 

보부상 유품전시관의 입구에서의 현판이며..

 

 

 

유품전시관을 들어서면 조선말, 일제 감점기의 사진으로 보이는 보부상의 모습들이 먼저 반깁니다.

 

 

 

유품전시관 내부의 모습으로,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라는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조직돼 전해 내려온 예산, 덕산 지방의 보부상을 관리하던 정부관서 입니다.

보부상(褓負商)은 보상과 부상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보상(褓商)은 비교적 값이 나가는 상품들을 보따리에 싸서 이거나 들고 다녔기 때문에 "봇짐장수"라 불렸으며,

부상(負商)은 가내에서 수공된 값싼 일상용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녀 "등짐장수"라고 하였는데,

이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통칭하여 보부상(褓負商)이라고 합니다.

보부상은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교환경제를 매개하던 전문적인 시장 상인이었는데,

국권침탈로 일본관헌에 의하여 보부상은 축출 되었으나,

예산.덕산 지방에서는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보부상이 우리사회에 끼친 역할은 컸으나 이에 대한 평가와 학문적 연구는 미미한 편여서,

"예덕상무사"는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우리 역사, 사회, 민속, 상업 경제사 등에,

연구 자료가 될만한 것을 보부상 유품 전시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소장된 유품은 도장 7개, 청사초롱 철구 1쌍, 공문 16권 등입니다.

 

 

 

보부상의 밀랍인형을 세워두고 뒤편에는 옛날의 사진자료를 크게 걸어 두어 이해하기 쉽게 해두었습니다.

 

 

 

보부상(褓負商)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게 해주었는데,

 이들은 대개 시장망을 돌면서 각지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으나,

대부상·대보상들은 수운(水運)과 우마차을 이용해 다량의 상품을 일시에 운반, 판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상의 단체인 부상단(負商團)은 조선 초에 조직되어 조정은 국가 대사나 국난위기 이들을 수시로 사역하기도 하였는데,

상이 언제부터 조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게 된 것은 1879년(고종19) 9월에 발표된 〈한성부완문 漢城府完文〉에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 자료에 의하면, 이전부터 지역적으로 각기 정해진 규율과 두령인 접장(接長)의 소임이 있어서 군료(群僚)를 통솔해 왔으며,

산재한 조직을 전국적인 상단(商團)으로 묶어 소규모 자본의 행상을 규합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보상단은 동료간의 결속을 다지고 무뢰한과 아전들에 의한 폐해를 금단함으로써 상권의 확립을 기하였습니다.

 

 

 

한성부에서 8도의 도접장(都接長)을 차출하면 일종의 신분증인 도서 (圖書 또는 驗標라고도 함)를 함께 발급함으로써 보상의 신분을 보장하였는데,

부상과 보상은 각각 별개의 행상조합으로 성장하였으나,

1883년에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여 보상과 부상을 완전 합동하게 하였고,

1885년에는 다시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부상을 좌단(左團, 左社), 보상을 우단(右團, 右社)으로 구별하고,

역원(役員)만은 상리국에 통합, 단일화시켰습니다.

이와같은 정부에 의한 보호와 관리가 시작된 것은 보부상이 강대한 조직체로 발전하여 정치적인 활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자료가 그리많은 보부상의 역사적 활동을 살펴보면,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국가의 유사시에 동원되어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여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의 행주산성전투에서는 수천명의 부상들이 동원되어 식량과 무기를 운반, 보급하고,

직접 전투에도 가답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인조가 남한산성에 행행(幸行)할 때 부상들이 식량을 운반하고 성을 방어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부상들에게 벼슬을 주려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자,

어염·목기·수철 등 다섯 가지 물건의 전매권을 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정조 때에 수원성을 축조할 때  당시 삼남도접장(三南都接長)인 김곽산(金郭山)이 부상을 징발하여,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여 다듬고 철기를 제련하여 장안문(長安門)을 만들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전국의 보부상이 동원되어 문수산전투(文殊山戰鬪)와 정족산전투(鼎足山戰鬪)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고 합니다.

 

 

 

그 뒤 보부상은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이속되었고,

1899년 다시 상무사로 이속되면서 부상은 좌사, 보상은 우사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1903년에는 부상과 보상이 공제소(共濟所)로 이관되었고 사동(寺洞 : 지금의 인사동<仁寺洞>)에 사무실을 두었고,

그뒤 다시 상민회(商民會)로 옮기고, 1904년에는 진명회(進明會)에 이속시켰다가 활동이 부진하자,

같은해 공진회(共進會)로 다시 이속시켜 회장 이준(李儁)과 총무 나유석(羅裕錫) 등의 통솔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일제의 보부상말살기도에 따라 전국의 보부상단체들은 거의 소멸되게 되었는데,


명맥을 유지하여 현존하는 보부상단체로는 충청남도의 부여·한산을 일원으로 하는 충청우도 저산팔구의 보부상단과,

예산·덕산을 중심으로 하는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가 있습니다.

 

예산을 다녀오면서 우연히 돌아보게된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의 이야기로,

막연하게만 알고있었던 보부상의 역활과 역사의 참여등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던,

"보부상 유품전시관" 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