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고도 부여를 여행하면서,

부소산성을 들어가기전 산성 아래의 (구)박물관 우측에 있는 부여동헌(扶餘東軒)을 찾았습니다.

 

여름철에 백제의 고도 부여를 찾으시면 빼놓을수 없는곳이 "궁남지" 입니다.

궁남지에서 연꽃과 수련의 향연을 즐기고 부소산성의 입구로 길을 잡았습니다.

 

 

 

부소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으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 역사 유적지구인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아래에 위치한 부여동헌은 부소산에 오르기 전에 둘러 봄직한 곳입니다.

 

 

 

부소산성 매표소에서 담장을 따라 멀지않은곳에 위치한 부여동헌 및 객사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부여현(부여군)의 공사를 처리하던 곳이며 길을 따라 조금더 가시면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관북리유적을 만날수 있습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의 입구의 모습으로, 

이곳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청으로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그리고 내동헌(內東軒)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곳은 내아의 출입문 이지만 관아의 정문처럼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문을 들어서면 부여현 내동헌(內東軒 -내아:內衙)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부여 현감이 거처하면서 생활하는 살림집이으로 정면 5칸의 팔작지붕집의  "-"자형의 구조로,

부속건물은 없고 내아(內衙)중 한채만 남아 보존되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내아는 가운데 3칸의 긴 대청마루와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으며,

 

 

 

마루위에 있는 현판도 보입니다,

 

 

 

마루에서 보이는 기둥과 들보의 모습으로,

장인의 솜씨가 엿보이며 단청까지 되어있어 특이 합니다.

 

 

 

문의 아랫부분에도 단청을 하여 문양을 넣어둔 모습도 들어 옵니다.

 

 

 

내아의 서편에는 부여동헌(扶餘東軒)이 자리하고 있으며,

부여동헌은 부여현의 관아로 1869년(고종6년)에 다시 지었으며 부여현감이 공적인 업무를 보던곳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의 초연당(超然堂) 현판이며,

이곳은 제민헌(濟民軒)으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에서 볼수있는 3칸 규모의 넓은 대청마루의 모습으로,

옆면과 뒷쪽에 판벽을 치고 판문을 달아두었습니다.

 

 

 

앞면에는 퇴주(退柱)를 세워 툇간(退間)을 두었고 서쪽 3칸 통간(通間)은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우측 2칸은 온돌방을 만들고 그 전면에는 툇마루를 놓았습니다.

 

 

 

부여동헌(扶餘東軒)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의 구조로, 

조선 후기의 건물로 외동헌(外東軒)·객사(客舍)·내동헌 등 3동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외동헌은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현청(縣廳)으로 1869년(고종 6)에 세워져 1880년에 중수되었으며,

1985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백제시대의 건축용 석재로 낮은 기단을 구획하고 역시 방형·원형의 백제시대의 주춧돌을 이용하여 방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공포가 없어 간결해 보입니다.

 

 

 

동헌의 서쪽에는 부여 관아의 중심건물중 하나인 객사가 있습니다.

객사는 왕명으로 받들고 내려오는 관리가 머물수 있는 숙소이자,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예를 올리는 곳으로..

가운데에 정당을, 양쪽에 좌.우익실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 건물의 모습으로,

박물관 진열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일부 변형되었으나 기본구조는 남아 있습니다.

 

 

 

부여 객사의 부풍관(扶風館) 현판이며,

 

 

 

객사는 1869년에 세워졌는데, 중앙의 정당(正堂)을 한층 높게 세우고 그 좌우에는 동서익실(東西翼室)을 두었습니다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맞배지붕 건물이며, 동서익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로,

관청의 손님, 사신이 유숙하던 건물인데 궐패를 안치하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동헌과 같은 해에 다시 지었는데 중앙의 정당(正堂)과 동서양쪽에 붙은 익실(翼室)로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양쪽 익실의 지붕은 가운데 정당보다 한 단 낮게 만들어진 건물모양으로 각 실의 위계(位階)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편 익실의 넓은 대청마루의 모습으로 부여현감이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정당(正堂)과 익실(翼室)이 만나는 부분의 지붕 아래의 모습으로

지붕의 높이를 달리하여 정당(正堂)과 익실(翼室)의 위계(位階)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서편에도 같은 크기의 마루와 방을둔 익실(翼室)의 모습입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따르면 이곳에는,

객사, 내아, 군기고, 향청, 작청, 현사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동헌(東軒).객사(客舍).내동헌(內東軒) 세곳이 남아 있습니다.

 

 

 

정당(正堂) 내부의 모습으로,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 또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정당(正堂)은 정면 3칸으로 정청 처마에는 봉황머리와 연꽃봉오리를 조각 하였다고 합니다.

 

 

 

주춧돌로 씌여진 돌들중 유난히 눈에 띄는 초석으로,

한눈에도 탑의 일부인 옥개석(屋蓋石)으로 보이는데 숭유억불의 소산으로 보여지며,

객사(客舍)의 곳곳에서 사찰의 석재들이 주춧돌로 사용되었슴을 볼수 있습니다.

 

 

 

부여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예속되면서 672년(문무왕12)에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고, 751년(경덕왕10)에 부여현(扶餘縣)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주와 병합되었다가 조선초인 1413년(태종13)에 독립하여 종6폼 현감이 고을 수장인 부여현이 되어 관리를 하였는데,

조선시대 부여현은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사비성 일대만을 관할하였다가,

1914년 인근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 공주군 일부가 편입되어 부여군이 되었습니다.

부여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고 주위에 넓은 평야가 있었지만 교통의 요지가 아니었기때문에,

 삼국시대 이후 큰 세력을 형성하거나 지역의 중심지가 되지 못하고 시골의 작은 고을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충남의 고도 부여(扶餘)를 여행하면서 돌아본  부여동헌(扶餘東軒)의 일원으로,

부여에서는 백제의 역사만 찾아 보다가 소홀이 넘어갈수 있는 문화재로 부소산성을 찾는 길이면,

백제역사유적지구인 관북리유적과 함께  잠시 시간을 내어 산책삼아 들러 봄직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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