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덕의 고장 예산을 다녀오면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古宅)을 다녀왔습니다.

 

조선후기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는,

추사체의 대가로 우리나라에 많은 명필이 있었지만 가히 으뜸이라 할만합니다.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태어나고 자란곳 입니다.

 

 

 

예산의 추사(秋史) 고택(古宅)은 넓고 말끔하게 정비가 잘되어 있는데,

추사(秋史) 유적지의 배치도를 살펴 봅니다.

추사고택은 266.11m²(80.5평)으로,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형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입니다.

 

 

 

이 고택은 추사(秋史)의 증조부인 영조대왕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이 1700년 대 중반에 건립한 집으로,

김한신은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로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아 자리잡았다고 하며.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사랑채가 눈에 들어 옵니다.

 

 

 


"ㄱ" 자형의 사랑채는 남쪽엔 한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과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으며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 하였습니다.

 

 

 

사랑채 의 뜰에는 꽃을 떨군 작약이 무성하며 댓돌 앞에 세워진 돌기둥은 추사(秋史)가 직접 제작하여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 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인 상우가 추사체로 쓴 것을 새겼다고 합니다.

 

 

 

추사(秋史) 고택(古宅)의 규모는 53칸인데,

영조는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축 비용을 분담하여 지어주도록 했다는데,

집을 지을 때도 궁궐 건축을 담당하는 경공장의 목수들을 파견하여 완성하여서 인지 추사고택은 격조가 있어 보입니다.

 

 

 

사랑채의 방앞에는 마루로 연결되어 있으며,

디딤돌과 마루아래의 초석들도 잘다듬어 세운 모습입니다.

 

 

 

사랑채의 문위에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가 있습니다.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歲寒圖)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입니다.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깔깔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습니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라 합니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일본로 건너가게 됐었는데,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신발이 헤어지고 무릎이 헐 정도로 찾아가 매달린 끝에 다시 찾아왔다고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추사의 글씨체로 유복량수(有福量壽)의 현판도 보입니다.

"많은 복과 한없는 수명"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유대복무량수(有大福無量壽)”라 써서 방문 윗벽에 붙여 있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바탕지는 낡아 없어진 것을 1976년 고택정화사업 때 떼어서 표구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글씨는 “많은 복과 한없는 수명”이란 뜻으로 추사(秋史)가 회갑(回甲)때 쓴 작품으로,

"유대복무량수(有大福無量壽)"는 불경의 극락왕생론(極樂往生論)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사랑채의 내부에도 가구등을 배치하여 살펴보는데 자연스러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안구가(新安舊家)"의 편액으로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온 집"이라는 뜻의 글도 볼수 있습니다.

39.3x164.2㎝의 크기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신안의 옛집" 이란 뜻으로,

주자성리학의 시조인 주희(朱熹)가 중국 송나라 신안인 이므로 "주자성리학자의 전통을 가진 집" 이라는 뜻입니다.

"가(家)" 자의 윗부분 점을 둥글게 처리한 것이 눈길을 사로잡고,

"신(新)" 자의 가로획을 촘촘히 붙여서 쓴 것과 세로획에 변화룰 준 부분이 특이하여 추사의 조형감각을 느끼게 하는 작품 입니다.

 

 

 

추사(秋史) 고택(古宅)은 온통 집 전체가 주련으로 두른 "주련의 집" 이기도 합니다.

서예의 대가 집 답게 수많은 주련이 대문 옆에도, 현관 앞에도, 기둥에도, 담벼락에도 걸려 있슴을 볼수 있어서,

학문과 예술에 높은 안목을 지녔던 추사(秋史)는 가고 없지만,그

의 글씨와 주련들이 남아서 생전에 가슴에 품고 있었을 사상과 뜻을 전하고 있는듯 합니다.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 이란 의미의 "죽로지실(竹爐之室)" 입니다.

이 작품은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준 것으로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차(茶)문화 중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며 추사와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추사는 늘 자신이 제조한 차를 보내주는 초의를 위해 초의가 차를 마시며 거쳐하는 방의 이름을 "죽로지실(竹爐之室)" 이라 짓고 그것을 써주었는데, 

다실(茶室)의 이름을 말함 입니다.

작품의 크기는 가로 150cm, 세로 30cm 정도로, 

추사 김정희 대표하는 명작중 하나로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추사(秋史)는 명필로 칭송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합니다.

 

 

 

사랑채를 돌아보고 안채쪽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안채의 외부에도 많은 주련들이 걸려있슴을 볼수가 있으며..

 

 

 

사랑채 바로 뒤에 붙은 안채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 형의 집입니다.

 

 

 

안채의 모습으로 특이하게도 안채에는 제대로된 부엌도 없고 나무도 하나 심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곳은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가 시집와서 기거하였기 때문에,

"ㅁ"자 형태의 집에 나무(木)이 들어 있으면 "곤할 곤(困)"자가 되어 좋지 않다 하여 집안에 풀 한포기조차도 자라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기에 큰사위인 월성위도 영조의 각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창의궁(彰義宮)에서 얼마 멀지 않은 적선방에 월성위궁(月城尉宮)을 마련해주고,

내당을 종덕재(種德齋), 외헌을 매죽헌(梅竹軒), 소정(小亭)을 수은정(垂恩亭)이라 손수 써서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부엌을 찾아보니 난방용 부엌만 보이는데 밥하는 부엌은 다른곳에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왕실사람에 대한 예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채의 마루와 방을 들여다 봅니다.

 

 

 

일반적으로 텅비어 있는 고택이 아니고,

옛사람들의 생활품들을 배치해 두어 고택은 살아있는 느낌이 듭니다.

 

 

 

안채에 이쪽 측면은 집안의 어른들이 거주했을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마당을 중심으로 부엌과 연결되니 큰 방이 안방인 것 같고 중앙 대청 건너의 방은 건넌방으로 보이는데,

평평한 대지위에 돌이나 기단으로 다양한 공간구성으로 고저가 있는 안채의 모습이 되었으며,

사랑채보다 안채가 높은곳에 자리하고 있슴도 추사(秋史) 고택(古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무척 아꼈다고 하는데, 

그녀가 둘째 딸이라고는 하지만 장녀인 화억옹주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죽어 사실은 장녀나 마찬가지였고,

그녀가 결혼할 당시 나이가 불과 13세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영조는 늘 가까이 두고 싶어 했으나 화순옹주의 슬하에 자식을 남기지 않고 부군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한신이 병사하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고 죽기를 자처하였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는 친히 딸의 사저를 찾아가 간절히 만류했다고 합니다.

이때 사저는 월성위궁을 말하며 영조는 죽은 이들에게 김한신의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입적토록 하여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그가 곧 추사(秋史)의 할아버지 입니다.

 

 

 

추사가 예산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생부인 김노경과 생모인 기계유씨가 결혼하여 월성위궁에 살면서 추사를 임신했으나,

당시 한양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이를 피해 예산으로 내려가 추사를 낳은 것 입니다.

 그후 추사는 어린 시절 한양 집에서 자랐으며 추사가 예산에 산 것은 9년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 난 64세 때였지만,  

얼마지 않아 한양에 올라갔으며 66세 때 다시 당쟁에 휘말려 다시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난 그는,

친부인 김노경의 묘가 있는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보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예산 추사고택은 추사가 태어나기는 했지만 이곳에 산 것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추사(秋史) 고택(古宅)은 옛날 53칸 집은 아니었는데,

현재의 집은 인간문화재인 이광규옹이 부분적으로 재현한 것이라 합니다.

 

 

 

안채를 돌아보고 안채의 뒤뜰로 나가 봅니다.

 

 

 

안채의 뒤뜰에는 담아래 그리 크지않은 정원이 있고,

 

 

 

추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들어가는 협문이 보입니다.

 

 

 

추사고택 영당(秋史古宅 影堂)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金商懋)가 세운 영당입니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權敦仁)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도왔고,

 

 

 

추사체로 추사영실(秋史影室) 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고 합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아들 김상무(金商懋)에게 주었는데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영당(影堂) 옆의 담장아래 보이는 까마귀 대나무 오죽(烏竹)으로,

벼목 화본과에 속하는 상록활엽교목으로 학명은 Phyllostachys nigra MUNRO 입니다.

중국 원산의 왕대속의 일종이나 전래경로와 연대는 미상이며 줄기의 색이 검기 때문에 오죽이라 불립니다.

오죽은 품위가 우아하여 관상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토양의 비옥도 수분을 많이 요구하나,

내한성이 다소 있어서 우리나라 중부 일부에서도 월동이 가능하여

오죽은 방풍림 뿐 아니라 정원이나 공원에도 알맞은 수종입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만큼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을 논하려면 김추사를 비켜갈 수 없다고 평 합니다.

 

 

 

추사(秋史) 고택(古宅)은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습니다.

 

 

 

영당(影堂)의 또다른 협문을 나오면 사랑채에 이르게 되고..

 

 

 

6월을 기다리는 매화의 결실인 매실이 탐스럽게 익어 갑니다.

 

 

 

추사(秋史) 고택(古宅)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보이는데,

 

 

 

예산 지방에는 추사의 탄생과 더불어 전설이 하나 전합니다.

추사가 태어나던 날 고택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뒷산인 용산과 그 조산이 되는 팔봉산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추사가 태어난 뒤에 물이 다시 샘솟고 풀과 나무가 생기를 회복하였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는데,

그래서 인근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큰 인물이 날 때는 주변 산천의 정기를 모두 끌어 당겨서 태어난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하였던 모양 입니다.

 

 

 

고택 옆 너른곳에 추사(秋史)의 묘역이 자리해 있습니다.

양택과 음택이 인근에 나란히 자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예이기도 합니다.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추사의 옛 집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추사(秋史)의 묘는,

2단으로 정지한 후 안치되어 있는데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부친 김노경씨와 모친 기계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박제가의 눈에 띄어 학예로 대성할 것을 예언, 수제자가 되었다고 하며

24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과 서체 등을 배웠으며,

순조 16년(1816)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여 밝혀내어 금석학에도 조예가 있슴을 보였습니다.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헌종 2(1836)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며,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헌종 6년(1840)에 제주도로 9년간 유배되었다가 헌종 말년에 귀양에서 풀렸는데,

제주도에 지내면서 그 동안 연구해 온 추사체를 완성하였습니다.

철종 2년(1851)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만에 풀려 돌아와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생활했던 시기는 얼마되지 않지만,

추사(秋史) 기념관과 함께 고택(古宅)과 그가 남긴 편액과 수많은 주련과 묘역이 있어,

살펴보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되돌아 보는데 부족함이 없는 예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古宅)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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