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의 정자 문화재 탐방길에서,

주천 주자천 변의 와룡암(臥龍庵)을 찾았습니다.

 

와룡암(臥龍庵)은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주천면사무소 동쪽 천변의,

주자천 변의 소(沼)에 용이 꿈틀거리다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와룡 바위 위에 날아 앉은듯 자리해 있습니다.

 

 

 

와룡암(臥龍庵)으로 들어서면,

세운지 오래지 않아보이는 기념비가 보이고..

 

 

 

주자천을 향하고 있는 정자의 뒷모습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와룡암(臥龍庵) 입니다.

와룡암은 본래 조선  효종(孝宗)5년(1654)에 긍구당 김중정(肯構堂 金重鼎/1602~1700)의 개인 서당으로 건립되어, 

그 후 250여년 동안에 많은 문인 학사들을 배출한 학당였습니다.

 

 

 

마루로 오르기전 마루 아래를 한번 살펴보고,

 

 

 

온돌의 불넣는 곳은 뒤편에 있는데,

굴뚝은 앞마루쪽으로 나와 마루아래에 있어 특이합니다.

 

 

 

 

자연암반을 초석삼아 그대로 기둥을 올리거나,

높이에 따라 자연석을 초석으로 두고 기둥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긍구당 김중정(肯構堂 金重鼎)이 세운 원래의 와룡암은,

주자천의 건너 편에 있었는데 물 때문에 내왕하기가 불편하였으므로 순조 27년(1827)에 김상원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고 하며,

건물은 도리 기둥에 난간을 갖추고 팔작 지붕에 기와를 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누각으로,

중앙에 전후퇴 형식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마루이며 방에는 4합문이 달려 있습니다.

주천 서원(朱川書院)의 강당 격으로 360여 년 동안 이어오면서 주천향약을 간행하였고, 많은 문인 학사들을 배출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와룡암(臥龍庵) 앞에는,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작은 소가 보이고,

 

 

 

내에서 물을 들인듯 물이들어오는 수구의 모습도 보입니다.

 

 

 

와룡암(臥龍庵)의 현판으로 영조(英祖)때 이조판서를 지낸 "도암 이체 (陶菴 李締/1678~1746)"의 친필이며,

 

 

 

와룡암(臥龍庵)의 마루에 오르니 여러 시판과 편액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마루에서 볼수있는 기정(起亭)의 편액으로,

와룡암(臥龍庵) 현판과 같이 도암 이체 (陶菴 李締)의 글씨이며..

 

 

 

후손 김기열(金箕烈)이 쓴 편액도 올려져 있습니다.

 

 

 

김재열이 쓴  긍구당(肯構堂) 편액입니다.

 

 

 

구조를 살펴보면 왼쪽에 작은 마루를 두고 온돌방을 들였으며 오른쪽에는 큰 마루를 두었습니다.

 

 

 

마루 가운데 들인 온돌방은,

전면에 방을 들였고 후면에 따로이 좁고 길다란 방을 들여서 특이합니다.

 

 

 

전면의 온돌방 내부의 모습이며,

 

 

 

후면의 작은 방도 문이 열려있어 들여다 봅니다.

 

 

 

후면의 방은 길고 좁다란 방으로,

제례에 사용하는 물품과 의복을 보관하는듯 하여,

예나 지금이나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의 용도로 쓰인듯 합니다.

 

 

 

제례때 쓰는것으로 보이는 의관속대(衣冠束帶)의 의복과 띠의 모습도 보이고,

 

 

 

작은방의 뒷면 위에는 작은 벽장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오른쪽의 마루는 제법 넓은편이며 판재로 벽을 막아두었고  많은 편액들을 올려져 있습니다.

 

 

 

시판(詩板)들과 "긍구당서(肯構堂書)", "와룡암기(臥龍菴記)", "와룡암흥학계서(臥龍菴興學契序:1911)",

"와룡암중수기(臥龍菴重修記:1965,1982)", "주천사중수기(朱川祠重修記 :1972)", "주천서원기(朱川書院記:1975)" 등의 편액도 올려져 있습니다.

 

 

 

주련(柱聯)도 기둥마다 걸려 있는 모습이고..

 

 

 

와룡암(臥龍庵) 마루에서 앞을 내려다 봅니다.

 

 

 

주자천을 건너는 다리가 놓이고 일부 세월의 영향은 있지만,

아직은 옛정취를 느껴볼만한 풍광 입니다.

 

 

 

와룡암(臥龍庵)의 주인인  김중정(金重鼎:1602~1689)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긍구당(肯構堂), 자는 자삼(子三), 본관은 광산이며,

공안공(恭安公) 의정부 좌찬성 겸광(謙光)의 현손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하자,

진안으로 내려와 주자천 하천가 와룡암 위에 강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며 89살에 생을 마쳤습니다.

용담 밤골에 그의 묘가 있으며 대사헌 박성양이 비문을 쓴 묘비가 남아 있습니다.

그의 저서는 후세에 전할 문헌이 많았으나 와룡암 서제가 천변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수해에 유실되어,

전해오는 것은 와룡암 서제에 걸려있는"긍구당서(肯構堂書)"와 시 두수, 그리고 "용담와룡암" 서제 상량문 뿐이라 합니다.

 

 

 

와룡암(臥龍庵)의 뒤편도 살펴봅니다.

 

 

 

남아 전하는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의 시한편을 가져와 봅니다.


주천우거시(朱川寓居詩)

數十年來未了緣      수십 년 동안 인연을 마치지 못했네.

這裏閒人無所事      그 속에서 한가한 사람 하는 일 없어

?令童僕理荒田       부질없이 아이종 데리고 거친 밭 가꾸네,

 

 

 

와룡암(臥龍庵)을 나와 내를 건너다 보니,

거북의 형상으로 물로 향햐는듯 보이는 바위가 있어 눈에 들어 옵니다.

 

 

 

내를 건너면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된 주천서원(朱川書院)이 있습니다.

 

 

 

주천서원(朱川書院)은 우리가 보아온 규모를 갖춘 서원이 아닌,

홍살문, 외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어 강학공간은 제외되고 제향공간인 사당만 있어,

주천서원은 주천 광산김씨 문중의 사당으로서 서원이 아니라, 사(祠)였으며,

1924년 김대현이 전국의 사우와 유림을 방문하여 협조를 구하여 광산김씨 문중에서 주천사를 창건 하였습니다.

 1975년 9월 14일 성균관장의 인준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 되었으며,

건물이 1942년 수해로 붕괴되자 중수되었고 1974년 두 번째로 중수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 맞배지붕건물로 전면에는 마루가 있고 뒷면에는 방이 있는 구조로,

주자(朱子), 여대림(呂大臨), 주잠(朱潛),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충립(李忠立), 김중정(金重鼎)등 7명을 배향 하는곳 입니다.

 

 

 

벼슬을 내려놓고 산간오지 주천에 들어와 은거 하면서,

서당을 열어 후학들에게는 충효와 근검정신을 일깨워 주었던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의 정신이 남아있는,

전북 진안의 문화재 "와룡암(臥龍庵)"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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