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사림(士林)의 한시대를 이끌었던 매계 조위(梅溪 曺偉)의 자취를 찾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 있는 율수재(聿修齋)를 찾았습니다.

 

경북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769번지 소재의,

율수재(聿修齋)로 들어가는 초입의 모습으로,

 

 

 

율수재(聿修齋)로 들어가기전 호리병 모양의 저수지가 보이고,

 

 

 

길 위에는 근자에 세운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보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사적비(事跡碑)와 매계(梅溪) 조위(曺偉)선의 서제(庶弟)가 되는 적암(適庵) 조신(曺伸)의 신도비 입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문신으로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로,

세조 5년(1459)에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 판서ㆍ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습니다.

그의 <조의제문>은 1498년(연산군 4)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인,

무오사화(戊午史禍)의 원인이 되어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많은 제자가 죽임을 당했고 중종 때 신원되고,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점필재집,청구풍아 등이 있습니다.

 

적암(適庵) 조신(曺伸)은 매계의 동갑내기 아우로,

매계 조위와 같이 자형(姊兄)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지만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역관(譯官)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편찬을 책임질 정도로 학문이 깊었기에 성종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당대의 학자들과도 깊이 교유하였으며,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었던 매계의 시신(屍身)을 전라도 순천에서 운구하여 장사지낼 정도로 우애도 깊었습니다.

중종은 이러한 적암(適庵)을 높이 평가하여, 사후(死後)에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비석옆에는 담장을 두른 또하나의 비석이 있어,

 

 

 

담장 앞에는 조위(梅溪 曺偉, 1454~1503)가 태어나고 자란 유허지임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고,

 

 

 

방형(方形)의 담장 안에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지붕없이 큰비신(碑身)을 등에 올리고 있는 거북이가 왜소해 보이기도 하는데..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사적비와 적암(適庵)의 신도비가 나란히 있고 옆에는 조위(曺偉)의 신도비가 있어, 

세 비석의 주인들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는듯 합니다.


 

 

 

저수지에서 율수재(聿修齋)로 들어오는 초입에는 정비공사가 한창이며,

쉼터로 마련되어있는 정자의 모습도 들어 옵니다.

 

 

 

정자가 있는 쉼터의 맞은편에는,

오래되어 쓰러진 고가(古家)의 모습이 들어와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 봅니다.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로 보여지는데,

한눈에 보아도 지은지 오래된 집으로 보이며..

 

 

 

처마의 모서리 부분은 내려 앉았고,

처마를 받치고 있는 서까래 의 모습으로도 당시 제법 잘지어진 건물임을 알수 있는데,

 

 

 

집의 담장에서도 이곳의 품격을 엿볼수 있는데,

벽면을 장식한 문양도 짜임새가 있거니와 절을 의미하는 만(卍)자의 형상도 들어있어 갸웃거리게 합니다.

 

 

 

협문이 보이면서 율수재(聿修齋)에 이르게 됩니다.

 

 

 

율수재(聿修齋)의 정문인 도덕문(道德門)으로,

 

 

 

도덕문(道德門)의 현판으로..

율수재의 도덕문(道德門)은 1707년(숙종34) 매계가 죽은지 204년만에 나라에서 문장(文莊)이라 시호(諡號)가 내려 그 기념으로 세운 대문으로,

시법(諡法)에는 도덕 박문으로 인하여 문(文)이라 하고, 행함이 바르고 뜻함이 온화하므로 인하여 장(莊)이라 하여,

도덕박문왈문(道德博文曰文), 리지화왈장(履志和曰莊)의 의미로 도덕문(道德門) 입니다.

 

 

 

문을 들어서면 연못이 자리해있고 연못을 건너는 아치형 돌다리가 있으며,

단을 두고 나이든 배롱나무 너머로 율수재(聿修齋)가 들어 옵니다.

 

 

 

조선 성종때 성리학의 대가요 대문장가인 문장공(文莊公)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유허지에,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학문소로 16세기 이후 성리학적 자연관에 따라 많이 지어진 선비들의 학문 및 휴식처로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자리 했듯이,

이곳 또한 전망이 좋은 장소에 자리해 있습니다.

 

 

 

율수재(聿修齋)의 주인인 매계 조위 (梅溪 曺偉:1454~1503)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며,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으며,

1472년(성종 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고,

그 뒤 홍문관의 정자·저작·박사·수찬, 사헌부지평·시강원문학·홍문관교리·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습니다.

이어 의정부검상·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이후 순천으로 옮겨진 뒤,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유배 중에도 저술을 계속, 『매계총화』를 정리하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작품으로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고, 저서로 『매계집(梅溪集)』이 있으며..

경상북도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에 제향되었고, 충청북도영동군황간의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주벽으로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입니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과 더불어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던 인물입니다.

 

 

 

마루앞에 크게 걸려있는 매계구거(梅溪舊居)의 현판으로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율수재(聿修齋)의 마루에 올라 봅니다.

 

 

 

율수재(聿修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중앙 2칸에 4칸규모의 대청을 놓고 그 좌측에는 각 1칸씩의 마루와 온돌방을 앞뒤로 배열하고 우측에는 2칸통의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2칸의 오른쪽 온돌방 문위에서 율수재(聿修齋)의 현판이 보이고,

 

 

 

왼쪽의  각각 1칸씩의 마루와 온돌방 쪽에는,

 

 

 

유예재(游藝齋)의 현판과,

 

 

 

지도재(志道齋)의 현판이 올려져 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 왼쪽의 1칸 온돌방을 들여다 보고,

 

 

 

마루를 건너 오른쪽의 2칸방으로 가봅니다.

종도리 장혀의 "숭정 기원후 병인 사월 초파일(崇禎 紀元後 丙寅 四月 初八日)"이라는 창건연대 상량문은,

개축 이후의 중수 때 묵서한 것으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구조양식은 19세기 후반 중수 때 모습으로 구조 양식을 보입니다.

 

 

 

2칸의 방이 트여 있어 제법 너른편이며,

 

 

 

바깓은 여닫이로 안쪽은 미닫이로 2중창의 모습을 볼수있어 겨울을 대비한 조선후기의 구조가 엿보이고,

 

 

 

뒷벽쪽에도 문이 보여 열어봅니다.

 

 

 

2중의 벽면을 두어 물건을 보관하면서 이또한 겨울철 북풍에 대비한 구조 입니다. 

 

 

 

너른 대청마루 에서는 많은 시판과 편액들을 볼수있는데,

 

 

 

매계유허(梅溪遺墟)의 현판이며,

 

 

 

율수재중수기(聿修齋重修記)외 시판과 여러 편액이 올려져 있습니다.

 

 

 

율수재(聿修齋) 마루에서의 보이는 풍광으로,

왼쪽으로는 대나무숲과 늠름한 노송의 모습이 보이고..

 

 

 

"매화를 마주하고 밤에 주역을 읽다(對梅夜讀周易)"로 매계선생문집(梅溪先生文集) 권1

 夜靜人閑獨閉門         고요한 밤 한가로워 홀로 문을 닫아걸고

伴燈看易對幽軒          등불 짝하여 주역 읽으며 그윽한 헌창(軒窓) 마주하네

讀來不覺梅花落          글 읽느라 매화 꽃잎 지는 것도 못 느꼈더니

飛撲床頭點素痕          책상에 날아들어 하얀 흔적 한 점을 남기었구나.

 

 

 

도덕문이 보이는 곳에서는 노거수 배롱나무가 있어 여름철이면 더욱 아름다울것으로 보여지며,

이곳 율수재(聿修齋) 에서는 1980년부터 '매계백일장'을 열어 조위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율수재(聿修齋)에 들었으니 사림(士林)에 대해 살펴 봅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표방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 것은,

100여 년이 지나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림(士林)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조선을 건국하는 데에는 정도전 등 관학파의 노력이 컸었으며,

이후 관학파들은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경국대전》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면서 유교 윤리의 기틀을 닦고 조선의 제도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조선다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즉위 후 사림(士林)이 등장 하면서부터 부터인데,

사림(士林)은 15세기 중반 이후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세력들을 말하며,

이들은 투철한 성리학적 이념을 발판으로,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도통(道通)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지는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도통론은 처음부터 존재했다기보다는 훗날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매계의 점괘(梅溪의 占卦)"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김천시 대항면 덕전리 세송(당시 마암동)에 매계 조위의 무덤이 있었는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의 화를 입었던 일화로,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매계는 사신으로 중국에서 돌아오고 있었는데,

 매계는 국내 소식을 듣고 신변을 염려하여 점술가에게 점을 쳤더니,

점괘에 ‘천층낭리번신출(千層浪裏飜身出), 마암산하숙삼소(馬岩山下宿三宵)’라고 나왔습니다.

앞 구절 즉 "깊은 물속에서 헤어날 수 있지만"의 뜻은 알았지만, "마암산 아래에서 3일 간을 잠잔다"는 뒷 구절의 뜻을 몰랐었는데..

 
뒷날 그가 병으로 생을 마친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해서 시신을 무덤 밖에 사흘 동안 흩뜨려 놓은 일이 있은 뒤에서야,

그 점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로 이 일화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등에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 하였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분류두공부시언해(杜詩諺解)" 25권 17책으로 완성하여 두시언해 초간본으로,

우리나라 고문, 고어 연구에 있어 국문학 사상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어,

당시의 학자들이 한문만을 숭상하고 우리의 글을 천대하던 때 조위는 한글에 대한 뛰어난 조예를 바탕으로 유창한 필치와 풍부한 어휘로 번역을 하였고,

우리나라 유배가사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지었으며 문장가이며 성리학의 대가인, 

매계 조위 (梅溪 曺偉) 유허지인 김천(金泉) 율수재(聿修齋)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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