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의 문화재 탐방길에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된,

풍산 류씨(豊山柳氏) 우천파(愚川派) 종택인 수암종택(修巖宗宅)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 자리한 수암종택(修巖宗宅)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이 37세에 가사리(佳士里)에 초가를를 지어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며,

그의 아들 류후조(柳厚祚, 1798~1876)가 헐고 다시 지은 풍산류씨(豊山柳氏) 우천파(愚川派) 종택으로,

이강정사(二江精舍), 우천세가(愚川世家) 또는 대감댁이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수암종택(修巖宗宅)이 자리한 이곳은 "삼산이수(三山二水) ·매화락지(梅花落地)"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낙동강(洛東江)과 지류인 위천(渭川)이 합쳐 이수(二水)가 되고, 속리산, 팔공산, 명산이 만나 삼산(三山)이 되는 형국으로,

명기(名基) 중의 한 곳이라 손꼽히는 곳으로 네모 반듯한 대지에  집터는 남남동향으로 앞에서부터 녹사청(祿使廳),안채,사당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종택(宗宅)으로 들어가는 솟을 삼문으로,

솟을대문은 1996년에 세웠으며 양쪽으로 맞담을 쌓았습니다.

대문에서는  "우천 현인 문화제"가 이곳에서 두번째로 열렸슴을 알수있는 현수막이 보이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녹사청(祿使廳)이 자리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아담한 정원이 들어옵니다.

 

 

 

수암종택(修巖宗宅)을 들어서면 가장먼저 만나게 되는 녹사청(祿使廳)으로,

녹사청은 집주인의 비서격인 녹사가 기거하며 봉조하의 녹봉을 지고 오는 지방관리들을 영접하고 유숙케 하였던 건물로,

다른 종택에서는 볼수없는 희귀한 건물로,

 

 

 

"ㄴ"자형의 정면 4칸, 측면 4칸의 구조에 우진각 지붕으로 다소 격이 낮은 건물입니다.

 

 

 

녹사청(祿使廳)의 한쪽은 보수공사를 하는듯 하여 내부를 들여다 보니,

 

 

 

바깥에서 보는것과는 달리 녹사청(祿使廳)의 구조는 마루한칸에 방한칸으로 배열 되어있어 특이합니다.

 

 

 

또한 녹사청(祿使廳)은 ㄴ자형으로 꺽이는 모서리에 부엌을 두고,

그 양쪽으로 온돌방과 마루를 배열하고 쪽마루를 돌려서 모든 방이 연결되게 해두었습니다.

 

 

 

녹사청(祿使廳)의 마당 건너편에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룬 몸채가 자리잡고 있어,

전형적인 영남 북부지방의 가옥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영남 북부지방의 가옥구조 특징인 "ㅁ"자형 구조로 폐쇄적인 가옥 구조를 보이는데,

이것은 겨울 바람을 막기위한 추위에 강한 가옥구조로 두꺼운 벽, 작은 창문, 낮은 천정이 특징인데, 

경북 북부 산간지방 쪽으로 갈수록 까치지붕집등 더욱  폐쇄적인 구조를 보이기도 하며,

상징적으로는 안사람(여자)을 가두어 두기위한 주택구조로 표현 되기도 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가져온 가옥구조의 그림으로 이곳 수암종택의 배치도는 아닙니다)

 

 

 

 

사랑채는 2칸 사랑방과 1칸 사랑마루방으로 꾸민 3량가로,

전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사랑방 가운데와 마루방 사이에 각기 네 짝 미서기와 4분합 들문을 달아둔 모습이보여, 

공간을 전용할 수 있게 했슴을 보여줍니다.

 

 

 

사랑채의 사랑방 방문위에는 우천세가(愚川世家)의 현판이 올려져 있으며,

 

 

 

또하나의 방문위에서는 작은 창문의 모습도 볼수있어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임을 짐작케 합니다.

 

 

 

사랑채의 왼쪽끝에는 담장을 옆구리에 끼고 초가가 한채 서있어,

바깥 창고인 고방(庫房)으로 보여집니다.

 

 

 

사랑채의 왼쪽끝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자리해 있는데,

중문을 좌측에 둔 것은 은밀한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시선을 차단하기 위한 배려이며,

 

 

 

안채로 통하는 중문 앞에는 나이든 호박이 문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중문을 들어서도 안채는 바로 보이지 않아,

몇걸음을 들어가 다시 몸을 돌려야 안채가 들어오는 형태로 "ㅁ"자 형의 가옥구조에서 쉽게 볼수있는 배치 구조이기도 합니다.

 

 

 

"之" 형태로 중문을 지나면 안채가 나오며,

안채는 앞쪽에 툇마루를 둔 2칸통 안방과 2칸 안대청을 가운데 배열하고 그 좌우에 각기 중문간채와 사랑채에 연접된 날개채를 달았고,

안방 좌측에는 부엌·마루바닥 고방·흙바닥 고방이, 안대청 우측에는 누마루·상방·마루·온돌방이 앞으로 뻗어 좌·우 날개채를 이루고 있으며,

 

 

 

상방 앞의 마루는 뜰집처럼 좁은 안마당에서 할 수 없는 작업을 우측편 넓은 뜰에서 할 경우 드나드는 통로 역할을 하는데,

사랑방 우측칸 뒤편에서부터 안대청까지 쪽마루를 시설하여 신발을 벗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를 오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안채의 오른편에서 너른 대청의 모습이 시원하게 들어오고,

 

 

 

마루의 문위에는 이강정사(二江精舍)의 현판이 올려져 있어,

수암종택(修巖宗宅)이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길지에 자리하고 있슴을 표현 하는듯 합니다.

 

 

 

대청마루에서 왼쪽방의 모습으로,

 

 

 

바깥의 여닫이와 안쪽으로는 미닫이 문을 두어,

겨울철의 찬바람을 막기위한 문구조로 조선 후기 주택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대청 마루위의 천정도 살펴봅니다.

대갓집의 안채 답게 좋은 목재로 건실한 결구의 모습이며 얼마전 지붕보수를 하였는지 서까래의 목재는 오래지 않아 보입니다.

 

 

 

안대청 우측 마루방은 바닥을 45cm 정도 높혀 누마루처럼 꾸몄는데,

마루방과 안대청 사이에는 머름을 들이고 3분합들문을 설치하고 들문 가운데 외짝 창을 부설하였습니다.

 

 

 

이집에서는 조선 후기 주택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쪽마루와 툇칸의 발달과 수납공간의 확장을 잘 보여 주고 있는데,

1762년 이전에 창건 되었다고 추정하나 후에 고쳐 지으면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며..

 

 

 

풍산 류씨(豊山柳氏) 우천파(愚川派) 문중에는 가전청백(家傳淸白)이라는 가훈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문중에서 지내는 불천위(不遷位) 제사에서도 뚜렸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수암종가는 제물을 준비할 때 다른 제물보다 야채로 된 제물이 많이 올라 간다고 하는데,

구이에서도 다른 불천위에는 잘 올라가지 않는 야채전이 많이 올리고 있다고 하며,

또한 경북지방에서는 설날 차례상에 만두 떡국을 올리지 않으나 수암의 후손들은 설에 만두 떡국을 만들어 올린다고 하는데,

이는 풍산 류씨 집안 선조들이 관직생활을 하며 여러 지방을 다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채에 딸린 고방의 모습도 보이며,

 

 

 

고방을 지키는 장석의 모습이 소박하게 다가옵니다.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도 능하여 통정대부에 올랐던,

"강고(江皐)류심춘(柳尋春:1762∼1834)"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1762년 이전에 창건되었다고 추정 하는것이며,

강고의 아들 "낙파(洛波)류후조(柳厚祚:1798∼1876)"도 이 집 태생으로 철종 9년(1858) 61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67세에 공조판서, 70세에 좌의정이 되고 늦은 환로(宦路)에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까지 이르러 "후덕중망(厚德重望)"의 일화로 회자 되었고,

그가 79세에 죽자 문헌공(文憲公)의 시호를 내렸는데 그로 인해서 이 집은 더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벼슬은 멀리 하였으나 1866년 병인양요때 의병장으로, 후진양성에 힘써 320명의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편술한 조선후기의 학자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1813∼1872)" 등 당대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안채를 돌아보고 사랑채의 바깓으로 나오니,

협문이 보이고 뒤쪽으로 사당이 자리해 있습니다.

 

 

 

수암종택(修巖宗宅)의 주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의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으로,

임진왜란 이후 아버지인 서애 류성룡(柳成龍)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년) 사마시에 장원했으나,

1612년 해서 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 무고를 당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가,

1616년(광해군 8년) 유일(遺逸)로 천거돼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됐으나 사양하였고,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學行)으로 천거돼 봉화현감이 되고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묘(田畝)와 부세(賦稅)를 바로 잡았습니다.

1624년 형조정랑이 됐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源獄)을 해결해 판서 이서(李曙)로부터 경탄을 들었으며,

1627년(인조 5년) 청도군수가 됐다가 이듬해 1634년(인조 12년) 사헌부지평에 이르렀으며,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사당은 수암종택(修巖宗宅)의 동북쪽에 따로 일곽을 이루고 있어,

 

 

 

수암사당은 불천위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신문(神門)인 사주문(四柱門)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갑니다.

불천위 제사는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덕이 높은 사람에 대해 그 신위를 영구히 사당에 모실 것을,

나라 혹은 지역 유림에서 허락한 조상의 기제사로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것은 크나 큰 영광이며 후손들에게는 큰 자부심입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간 반 통(間半通)구조의 맞배지붕으로 앞의 반 칸을 벽체 없이 개방하였는데 살기둥의 주초석은 모를 죽인 팔각형이며,

위 부분이 좁아진 사다리꼴을 하고 있어 조선 후기 최상급의 벼슬살이한 명망있는 집의 가묘답게 조성하였습니다.

 

 

 

명당에 자리하여 많은 명현을 배출한 고가로,

녹사청(祿使廳)이라는 특별한 건물과 조선 후기 주택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쪽마루와 툇칸의 발달과,

수납공간의 확장을 잘 보여 주고 있는곳으로 경북 상주의 명가(名家) "수암종택(修巖宗宅)"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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