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의 문화재 탐방에서,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의  금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나성 독락정(羅城 獨樂亭)"을 찾았습니다.

 

홀로 즐긴다는 의미의 "독락(獨樂)"의 정자는 옥천 안남의 독락정(獨樂亭)과,

경주 옥산서원의 보물문화재인 독락당(獨樂堂), 영천 자양면 독락당(獨樂堂)이 있으며,

그 외에도 크게 이름나 있지않은 독락(獨樂)의 정자 유적은 여러곳에서 볼수 있습니다.

 

 

 

들판 한가운데 있는 나성을 등지고 낙락장송이 우거져 있으며,

앞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는곳에 자리한 독락정(獨樂亭)으로,

 

 

 

 

독락정(獨樂亭)으로 들어가는 입구앞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 한기를 볼수 있는데,

글도 희미하고 안내나 설명이 따로없어 알수가 없습니다.

 

 

 

독락정(獨樂亭)의 안내문을 통해 정자의 구조와 내력를 살펴보면,

 

 

 

독락정(獨樂亭)은 고려 말의 전서(典書) 임난수(林蘭秀)가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금강변 월봉 아래 은거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생활하던 곳으로 임난수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인 양양도호부사 임목(林穆)이 부친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임목 또한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여러차례 고쳐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곳 입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가운데 방을 들인 구조이며,

 

 

 

독락정(獨樂亭)의 현판으로,

독락(獨樂)은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기(獨樂園記)"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정자로 오르기전 마루 아래를 살펴보니 온돌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루방임을 짐작케 합니다.

 

 

 

화강암의 초석을 길게하여 마루위까지 올라와 있어,

기둥은 상대적으로 짧아져 특이하고,

 

 

마루위로 올라온 돌기둥에 홈을 내어 난간을 두른 모습도 보입니다.

 

 

 

마루에 올라 마루의 뒤편 가운데에 들인 방을 들여다 봅니다.

 

 

 

역시나 정자의 방은 마루방으로 3면은 열려 있고,

들문을 활용해 자연을 그대로 방안까지 들일수 있으며,

별도의 난방 시설이 없는 점을 들어 비바람을 피하는 용도이며 여름정자로 활용했던것으로 보여 집니다.

 

 

 

한칸의 앞마루를 내어주고 뒷쪽 한칸에 방을 들여서인지,

우물반자의 연등천정이 방안으로 반쯤만 들어와 있습니다.

 

 

 

여름의 시원함과 주변풍광을 방안까지 들일 요량으로,

문을 들어 올리는 들문의 장치도 보여 우리나라 정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락정(獨樂亭)의 무루에서 우물마루의 모습도 살펴보고,

 

 

 

단청을 한지 오래지 않은듯 하며 문양과 색채의 화려함을 보여줍니다.

 

 

 

정자의 방문위에 올라있는 또다른 글씨체의 독락정(獨樂亭) 현판이며,

 

 

 

독락정시(獨樂亭詩)의 현판으로 중수기 현판은 보이지 않고,

 

 

 

독락정기(獨樂亭記)는 독락정의 건립 배경과 경관 및 그 의의에 대해 쓴 기문(記文) 형식의 글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경재(敬齋) 남수문(南秀文, 1408~1442)의 글이며 1420~1430년경에 쓴것으로 전하는데,

500년 전 독락정에서 바라본 사방의 경관을 알아볼수 있는 글로,

江之平沙漫流      강의 질펀한 모래밭 넓게 흐르는 물

 天水一色           하늘과 물이 한 빛인데 

風而綠皺            바람 불면 푸른 주름살이오

月而銀波            달 비치면 은물결이라

남수문(南秀文)의 독락정기(獨樂亭記) 일부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독락정(獨樂亭)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현대화의 영향으로 마천루가 들어서 있지만 금강의 물은 여전히 푸르고,

 

 

 

금강교가 보이는 정면 풍경으로, 

앞으로는 너른 평야와 멀리는 계룡산까지 보이는 멋진 풍광의 정자 였을듯 합니다.

 

 

 

독락정(獨樂亭)은 말 그대로 혼자 낙낙하는 정자란 뜻인데,

아들인 임목이 이 정자를 지으며 붙인 이름이니 후손 기철(琦喆)이 쓴 "행단구사우실기(杏壇舊祠宇實記)"를 보면,

“상전벽해 세상이 여러 번 바뀌었어도      이 행단 한구석의 붉은빛 사당 푸른 기와는     능히 옛날의 모습을 지녔고

싸움판 불속에서 모습을 바꾸지 않고       예와 같이 거의 오백 년이라                        오르고 내리는 혼령이 곁에 있는 것 같고

행단 둘레 십수 리 안에 사는 자손들이     낮이나 저녁에 바라며 사모하여                    기침소리 듣는 듯하다.“며 임난수를 추모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조선조에 들어 벼슬에 나간 지인들과 연을 끊고,

비록 벼슬에 나가지 않은 혼자이지만 고려를 기리며 즐거이 지냈다는 의미로 보여 집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독락정(獨樂亭) 뒷쪽에 있는 임난수 장군 신도비(林蘭秀將軍神道碑)와 부안임씨 사당이 있는곳으로,

그 주변이 발굴조사로 출입금지 구역이 되어 가볼수없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독락정(獨樂亭)의 주인인 임난수(林蘭秀:1342~1407)는 공조전서.녹사.낭장.호군 등 역임한 무장으로,

고려 말 32세의 나이로 최영 장군과 함께 원나라의 침공 이후 잔존 세력들이 남아 있던 탐라(제주도)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최영장군과 탐라 정복시 오른팔이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집에 꽂고 계속 싸워 전승으로 이끌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 때 공조전서(조선의 공조판서격)를 지낸 임난수 장군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공주 삼기촌(현 연기면 세종리)에서 16년간 은거하다 66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사후에 나라에서 1422년(세종 4)에 비석을 건립하였으며,

1710년(숙종 36) 기호서사(岐湖書舍)가 창건되어 임난수(林蘭秀)와 임목(林穆) 부자를 향사하였습니다.

 

 

 

가을을 보내는 은행잎이 바닥에 가득합니다.

인근에 있는 임난수(林蘭秀)장군의 세종리은행나무와 그의 사당인 숭모당도 함께 돌아봄직 합니다.

 

 

 

세종특별자치시를 대표하는 정자로,

임난수(林蘭秀)의 충절과 그의 아들 임목(林穆)의 효심을 찾아볼수 있는곳,

나성독락정(羅城獨樂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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