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의 문화재 탐방길에서,

조헌(趙憲)과 송시열(宋時烈)의 강론처 였던 "옥천이지당(沃川二止堂)"을 찾았습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에 위치한 "옥천이지당(沃川二止堂)"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이지당(二止堂)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과 조헌(趙憲)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강론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입니다.

 

 

 

강건너에서 이지당(二止堂)을 바라볼때 멋진곳에 자리 잡았슴에 감탄했었는데,

낮은 다리를 건너며 다시보게 합니다.

 

 

 

이지당(二止堂)의 주차장은 별도로 없지만 입구에 공간이 충분하여 주차에 어려움은 없으며,

강을 따라 나있는 나무데크길을 통하여 들어갈수 있습니다.

 

 

 

이지당(二止堂)으로 들어가다 보면 기암괴석이 서있슴을 보게 되는데,

 

 

 

암벽의 아랫부분에 이름인듯한 세글자의 음각이 보이는데,

우리나라 산수 좋은 암벽에는 사람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문구들을 새겨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오랜세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바위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로 근세에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암벽의 윗쪽에 마치 덮개가 있는 바위처럼 보이는곳에도 붉은글씨가 보이는데,

유교적 정치적 구호 혹은 표어 같은 문구들을 암벽에 새겨놓음으로써 학맥을 과시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이와 같은 글귀들이 석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주자성리학 절대주의가 한창이던 17세기 연간으로 보입니다.

 

 

 

암벽에 붉은 글씨로 암각된 "이지당 중봉선생유상지소(二止堂 重峯先生遊賞之所)"의 글로,

왼쪽에 "우재선생서(尤齊先生書)"라 새겨져 있는데 "우재(尤齊)"는 우암의 또 다른 호라고 하며 중봉(重峯)은 조헌(趙憲)의 호 입니다,

우암이 이곳을 방문하여 "이지당(二止堂)"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남긴 글씨라고 합니다.

 

 

 

글씨가 있는 암벽을 지나면 여러명이 앉아서 즐길만한 평평한 바위가 물가에 있고,

 

 

 

조선시대의 학당인 이지당(二止堂)이 자리해 있어,

 당초에는 각신동(覺新洞)이라는 마을 앞에 있었으므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하였으나, 

뒤에 송시열이 《시전 詩傳》의 “고산앙지경행행지(高山仰止景行行止”라는 문구에서 이지당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중엽 옥천읍 옥각리에 사는 금(金), 이(李), 조(趙), 안(安)의 4문중이 합작해서 세운 서당으로 알려 있습니다.

 

 

 

이지당(二止堂)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조헌(趙憲:1544~1592 )의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며 경기도 김포 출생으로,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습니다.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으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습니다.

1587년이후 여러차례의 상소문과 옥천에서 상경하여 대궐문 밖에서 청하길 반복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습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입니다.

 

 

 

 

이지당(二止堂)은 가운데 본채를 두고 양쪽에 누각을 두었는데,

왼쪽에 비해서 작아 보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오른쪽의 누각으로 먼저 가봅니다.

 

 

 

나무계단을 통해서 누마루로 올라 봅니다.

 

 

 

마루는 그리 넓지 않으며 높이도 다소 낮은편이지만,

 

 

 

마루에서 금강으로 향하는 소옥천의 풍광을 즐기기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지당(二止堂)은 전체 규모가 건평 40평으로 본채 1동과 누각건물 1동으로 되어 있으며,

1966년 12월에 정각(亭閣)을 보수한 바 있습니다.

 

 

 

본채는 석축기단 위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木造瓦家)의 팔작집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로 되어 있는데,

앞에서 보아 본채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 팔작집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두른 층루건축물(層樓建築物)입니다.

 

 

 

기둥을 받치는 초석과 디딤돌은 자연석을 사용하였는데,

나즈막한 디딤돌에 의지해 마루로 올라 봅니다.

 

 

 

대청 마루에서의 이지당(二止堂)의 지붕구조는,

간결하면서도 깔끔한 결구의 모습을 볼수있고,

 

 

 

마루 에서 볼수있는 이지당(二止堂)의 현판으로 송시열의 글이라 합니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송성뢰(宋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으로,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던 인물로,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는데..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으며 정치 사상계의 거장으로 유림 위에 군림했던 인물입니다.

 

 

 

마루에서 내려와 왼쪽의 누각으로 향합니다,

 

 

 

이지당(二止堂)의 안을 들여다 볼수있는 문은 모두 닫혀 있는데,

문을 걸어두는데 이곳은 다르게 자물통을 걸어둔 모습이 들어옵니다.

어차피 열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열수 있을듯 보여서 유혹을 하는듯 합니다.

 

 

 

누각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높은 단 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둘렀는데..

 

 

 

튼튼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누각의 아랫부분을 살펴보고,

 

 

 

나무계단을 통해 누각으로 올라봅니다.

중층의 누각은 아래어서 보는것과는 달리 낮은편 이지만,

소옥천과 주변풍광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반대편과는 달리 이곳누각은 비바람을 피할수 있는 방이 한칸 딸려 있고,

 

 

 

크기의 차이인지 팔작지붕여서 인지 알수없으나 건너 누각에 비해 나무의 부재도 튼튼해 보입니다.

 

 

 

누각의 마루에서는 소옥천과 건너온 다리와 옥각리 방향의 풍광을 볼수있고,

 

 

 

누각아래로 금강을 향해 흐르는 소옥천의 맑은물도 보입니다.

 

 

 

조헌(趙憲의 시(詩) 한편을 가져와 봅니다.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汀)으로 가리라                    지당(池塘)에 비뿌리고 양류(楊柳)에 내끼인 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夕陽)에 무심(無心)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라

평사(平沙)에 낙안(落雁)하고 황촌(荒村)에 일모(日暮)로다      어선도 도아들고 백구(白鷗) 다 잠들 적에 

빈 배에 달 실어 가지고 강정(江汀)으로 가리라

위의 시는 무심히 노니는 갈매기를 보면서 당쟁에 여념이 없는 조정의 간신배 들의 작태에 한숨지으며  지은 시조라 합니다.

 

 

 

누각의 마루에서 이지당(二止堂)으로 들어오는 길목도 살펴보며 누마루에서 내려 옵니다.

 

 

 

이지당(二止堂)의 지난 세월을 다시 살펴보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趙憲:1544∼1592)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처음에는 각신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고 하였다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던 곳입니다.

송시열은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의 끝인 2개의 지(止)를 따서 "이지당(二止堂)" 이라 서당의 이름을 고치고 현판을 써서 걸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세월이 흘러 퇴락한 것을 광무 5년(1901)에 처음 지었던 옥천의 금씨·이씨·조씨·안씨 네 문중에서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지당(二止堂) 뒷쪽도 살펴보고 왔던길을 되돌아 나옵니다.

 

 

 

금강의 물가에서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곳은 무수히 많지만,

옥천의 이지당과 가까운곳에 독락정과 한천정사가 있어 함께 돌아볼만 합니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두 인물의 유허(遺墟)가 남아 있는곳으로,

인재를 모아 강론에 힘썻던 강학의 공간으로 풍광 뛰어난 곳에 자리한 "옥천이지당(沃川二止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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