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을 다녀오면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된 "하학재(下學齋)"를 찾았습니다.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177번지에 위치한 하학재(下學齋)로,

이곳을 찾았을떄 때마침 묘사(墓祀)가 있는날 여서 재실입구에 차량과 문중분들이 많이 보입니다.

 

 

 

상달암(上達菴) 일부의 전경으로,

하학재(下學齋)에 이르기전 가까운곳에 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재사인 달전재사(達田齋舍)를 찾았으나 보수중였고,

손소(孫昭)의 묘를 지키는 분암(分菴)인 상달암(上達菴)은 문이 걸려 있어 담장 너머만 맴돌다가 되돌아 와야 했습니다.

 

 

 

하학재(下學齋)의 삼문을 들어서니,

묘사(墓祀)를 지내고 술이나 음식과 같은 제수를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도 마친듯 나오시는 분들도 보입니다.

 

 

 

하학재(下學齋)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현신(賢臣)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 1463~1529)의 도음산(禱陰山) 묘하재사(墓下齋舍)로,

 

 

 

재사(齋舍)의 마당에는 음복(飮福)을 하며 집안일을 상의하는듯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분들도 보이는데,

 

 

 

이방인인 저에게 따로 상을 차릴테니 음식을 드시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마루 앞에서 볼수있는 하학재(下學齋)의 현판이며,

 

 

 

문중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디딤돌을 밟고 마루로 올라봅니다.

 

 

 

하학재(下學齋)의 주인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은,

양동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 1433~1484)의 5남 2녀 중 2남으로 1489년(성종 20년) 문과에 급제 후 벼슬길에 올랐고,

연산군 10년 김해도호부사 때 간언하다 파직되었으나, 중종(中宗) 즉위 후 150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주민들이 연임의 상소를 올렸고, 이임 후 상주 단밀현(丹密縣)에 생사당을 세워 화상을 모시고 제향을 받들었습니다.

1509년 우승지로 승진, 이어 좌ㆍ도승지를 거치고 1510년 청백리에 록천되었으며,

형조ㆍ예조ㆍ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517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후에 공조ㆍ이조판서와 세자시강원빈객을 지낸 후,

도승지, 대사헌, 대사간을 거쳐 경사ㆍ충청ㆍ전라ㆍ함경도의 관찰사 및 한성부윤 등의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65세 때인 1527년(중종 22년) 월성군(月城君)에 습봉(襲封)되었습니다.

중종 24년 67세로 서울 사저에서 졸하니 국왕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조회를 이틀간 파하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제문을 지어 치제하고 당시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하여 대소신료 50여명이 제문을 지어 그의 유업을 추모하였으며. 

달전리 도음산 유좌(酉坐)에 장사지냈으며 중종 28년 계사년(癸巳年)에 경절(景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마루쪽으로 나있는 문은 들문으로 사용한것으로 보이는데,

 

 

 

문의 형태와 문앞의 걸쇠로 보아 들문으로 여름에 시원하고 넓게 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왼쪽의방은 문이 열려있어 들여다 보니 두칸의 방으로 넓고 밝은편 입니다.

 

 

 

마루에서 살펴보니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는지 새로운 목재가 군데군데 보이며,

 

 

 

마루위에는 하학재중수기(下學齋重修記)의 편액과 중수를 하면서 기록된 내용도 볼수 있습니다.

 

 

 

하학재(下學齋)의 천정구조도 살펴보고,

 

 

 

재사(齋舍)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마당의 왼쪽에 주사가 자리해 있고,

 

 

 

오른쪽엔 음식을 준비하는 제수청이 자리해 있어,

제수청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우진각 홑처마지붕으로 되어있고 깬돌을 두벌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집으로,

좌측 2칸은 통칸으로 되어있는데 전면에는 각 칸에 궁판양개 세살문을 달았고 3량가 연등천장의 종도리 하면에,

단기 4290년 4월 20일(1957년)이란 상량문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도음산 묘하(墓下)의 재사(齋舍)인 하학재(下學齋)는 우재(愚齋)의 현손(玄孫)인 종하(宗下)가 1663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나,

대청 상부가구에 있는 1873년에 기록된 상량문(上樑文)의 내용에,

"숭정기원후 5계유 9월초 6일 신해미시입주 21일 병인사시상량(崇禎紀元後五癸酉九月初六日辛亥未時立柱二十日丙寅巳時上樑)"이 있어, 

1800년대에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재사(齋舍)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 홑처마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구조는 자연석 초석위에 전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웠고 기둥상부는 쇠서위에 꽃을 조각한 초익공에 주두와 소로로 수장하였고,

보머리에 봉두(鳳頭)를 꽂아 장식하였습니다.

대청상부 가구는 5량가(樑架)이고, 들보 위동자주에 주두를 놓아 종보를 얹었고 종보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장혀를 받쳤으며,

박공지붕의 양 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는데 아래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아 1800년대의 대중수시에 목구조 세부의 고격(古格)이 많이 사라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나라안을 발칵 뒤집었던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이곳도 피해를 입어 벽체와 기둥에서 균열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큰피해가 아녀서 다행이며,

애포에 달전재사(達田齋舍)와 상달암(上達菴)을 함께 돌아 보려 하였으나 여건이 되질 않았고, 

하학재를 보는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포항의 문화재 "하학재(下學齋)"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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