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의 정자를 찾아,

문경 가은의  선유동계곡(仙遊洞溪曲)에 있는 학천정(鶴泉亭)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403-0번지에 위치한 학천정(鶴泉亭)으로,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의 정점인 제9곡인 옥석대(玉舃臺)위에 자리해 있어,

 

 

 

참고로, 학천정(鶴泉亭)의 위치를 쉽게 알아볼수 있는 "학천정의 외원(鶴泉亭 外園)으로 김영환의 2014년 작품 입니다.

 

 

 

학천정(鶴泉亭)으로 들어가기전 계곡옆의 암벽이 있어,

 

 

 

암벽에는 여러 글씨가 암각되어 있으나,

오른쪽 윗쪽에 선명하게 마애석각으로 "남근흥암(南近興巖)", "북접화양(北接華陽)" 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는 남쪽 가까이에는 흥암이 있고, 서쪽으로는 화향이 인접해 있다.’ 라는 뜻으로,

흥암(興巖)은 경북 상주시에 있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모신 흥암서원(興巖書院)을 말하고,

화양(華陽)은 충북 괴산군에 있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을 일걸음 인데,

위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노론의 거두였던 인물들로 위에 새겨놓은 글귀는,

노론세력들이 두 사람을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고자 의도적으로 각자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선유동(仙遊洞)은 "신선이 노닐던 계곡"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선유동 계곡은 아름다운 경승을 아홉 구비로 나누어서 선유구곡(仙遊九谷)이라 일컬는데,

 선유동계곡(仙遊洞溪曲)은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해발 969m인 둔덕산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따라,

약 1.8km에 걸쳐 기암괴석과 맑은 옥계수가 곳곳에 선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학천정(鶴泉亭)과 마주하는곳에  글씨가 있는 큰바위가 있어,

 

 

 

바위에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대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선유동(仙遊洞)"의 암각된 글이 보입니다.

 

 

 

최치원(崔致遠)의 선유동(仙遊洞) 글씨 아래는 선유구곡(仙遊九曲)의 정점인 제9곡인 옥석대(玉舃臺)로, 

선유동 계곡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으로 꼽히는 곳으로 길게 파인 너럭바위 사이로 옥빛 계곡수가 청량한 물소리로 흐르는 곳입니다.

 

 

 

수백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암석들은 마치 대리석을 다듬어 뉘어 놓은 듯하고,

자연스레 켜켜이 포개진 넓적바위들은 마치 일부러 쌓아 놓은 듯 정교하기 그지없는데,

솜이불을 깔아 놓은 듯 하얀 암반이 절묘하게 계곡 하상을 이룬 가운데,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옥계수는 마치 수정 같아서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줍니다.

 

 

 

아랫쪽에는 다듬어 놓은 듯한 너럭바위에 올라 앉은듯한 큰바위가 있어,

 

 

 

이곳에서도 옛사람들의 흔적을 많이 볼수 있어 이름인듯한 여러개의 음각이 보여,

우리나라의 경관 좋은 암벽에는 사람의 이름부터 시작하여 문구들을 새겨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오랜세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바위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로 근세에 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유교적 정치적 구호 혹은 표어 같은 문구들을 암벽에 새겨놓음으로써 학맥을 과시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이와 같은 글귀들이 석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주자성리학 절대주의가 한창이던 17세기 연간으로 근대에 까지 이어져온 표식으로 보입니다.

 

 

 

선유구곡(仙遊九谷)의 제9곡 옥석대(玉舃臺)의 "옥석(玉潟)"은 "옥으로 만든 신발"이란 의미로,

한나라 유향(劉向: BC77-BC6)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옥석에 관한 일화에서 인용 되었는데,

 

 

 

옥석 이라는 말은 "득도자(得道者)가 남긴 유물"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도를 깨친 사람이 남긴 유물이 있는 곳이 바로 "도가 지극한 공간" 이라는 의미여서,

제9곡인 옥석대(玉舃臺)가 선유구곡(仙遊九谷)의 정점임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선유동계곡(仙遊洞溪曲)은 도암(陶庵) 이재(李縡)를 비롯하여 신라의 석학 고운 최치원,

조선의 석학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병옹(炳翁) 신필정(申弼貞) 등 명인묵객(名人墨客)이 즐겨 찾는 비경의 장소로,

 

 

 

선유동은 내선유동(內仙遊洞)과 외선유동(外仙遊洞)이 있는데,

내선유동은 충북 청천의 화양동에 인접하여 있고,

외선유동은 문경에 있으며 학천정은 외선유동 중에서도 마지막 지점에 있습니다,

선유동계곡은 구한말 학자 외재 정태진(畏齋 丁泰鎭: 1876-1956)에 의해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이란 명칭으로 불려졌는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주자(朱子)의 복건성(福建城)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비유하여 이름붙인 것이라 합니다.

 

 

 

학천정(鶴泉亭)은 외선유동의 제9곡인 옥석대(玉舃臺)의 초입에 세워져 있는데, 

그윽한 풍모의 정자와 깊은 계곡이 어우러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풍광을 즐겼던 옛사람들의 정취를 느낄수 잇습니다.

 

 

 

학천정(鶴泉亭)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정자의 좌,우로 협문을 두어 드나듬에 편하게 해둔 모습입니다.

 

 

 

학천정(鶴泉亭)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도암(陶菴) 이재(李縡 : 1680~1746)가 후학을 가르치던 자리에,

지역 유림들이 그의 덕망을 기려 중건한 별서 건물이며,

 

 

 

정자의 오른쪽 뒤편에는 한단 높게 사당이 자리해있어,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영정을 모신 도암영각(陶菴影閣)으로 1칸의 맞배지붕으로 2002년에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도암영각(陶菴影閣)뒤 암벽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깊게 새겨진 예서체의 글이 있어,

 

 

 

산고수장(山高水長)은 "높이 솟은 산처럼, 길게 흐르는 물"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인격과 풍모를 비유한 말 이지만,

나중에는 심후한 은덕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는데 석각의 글씨가 도암(陶菴) 이재(李縡)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재(李縡)는 용인 태생으로 경주이씨의 계파인 우봉(牛峰: 黃海道 金川郡) 이씨이고, 호는 도암(陶菴) 또는 한천(寒泉)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이재는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한 노론(老論) 의 대표적 인물로,

호락논쟁(湖洛論爭) 당시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제자인 이간(李柬: 1677-1727)의 학설을 계승하여,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고 융화적 세계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펼쳤습니다.

그는 중부 만성(仲父 晩成)에게 사사받았고, 당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문인이기도 하며,

42세까지 대사헌, 한성부윤, 이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를 역임했으나 1722년 임인옥사(任寅獄事)때 경종을 암살하거나 폐위시키는데 관여했다고 하여,

스승인 중부 만성(仲父 晩成)이 옥사하자 사직하고 강원 인제에 들어가 성리학에 몰두 했습니다.

1725년 영조 즉위 후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에 이르렀으나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때는 소론학파들에 의해 서울 성문 밖으로 쫓겨나게 되어,

이때부터  정쟁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관직을 멀리하고 문경 가은(聞慶 佳恩)과 용인 한천(龍仁 寒泉)등에 머물면서,

오원(吳瑗:1700-1740), 임성주(任聖周:1711-1788), 김원행(金元行:1702-1772), 송명흠(宋明欽:1705-1768) 등 많은 학자를 길러 내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청나라의 학문과 문물을 배워 조선의 물질경제를 풍요롭게 하고 삶의 질을 높이자고 한 북학(北學)사상 형성의 토대를 이룩했으며,

사후에는 용인시 이동면 원리에 묻혔으며 용인시 이동면 천리에 있는 한천정사(寒泉精舍)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사례편람(四禮便覽),가례원류(家禮源流) 등이 있습니다.

 

 

 

해행체(楷行體)로 쓰여진 학천정(鶴泉亭) 현판으로,

낙관이 없어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 없으나 굵은 필선이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데,

 학천정(鶴泉亭)은 학천대(鶴泉臺)에서 학(鶴)자를 따고, 옥석대(玉潟臺) 아래의 계류에 모인 물이 샘(泉)을 이룬다고 하여 천(泉)자를 딴것이라 합니다.

 

 

 

학천정(鶴泉亭)으로 오르는 길은 정자의 뒤편에 있어 마루로 올라봅니다.

 

 

 

학천정(鶴泉亭)은 삼면에 마루를 두고,

중앙뒷편에 1칸규모의 방을 들였는데 호남에서 많이 볼수있는 평면구조로,

 

 

 

정자의 마루 가운데 있는 방문 위에는 성심당(性心堂)의 현판이 보이고..

 

 

 

방의 내부는 환하며 깔끔하게 관리를 하는듯 합니다.

 

 

 

이재(李縡)는 1727년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미환국(丁未換局)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집안 동생인 이유(李維)에게 이곳 선유동계곡 중에서도 외선유동(外仙遊洞)에 둔산정사(屯山精舍)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후 둔산정사는 부지가 협소하고 화재의 위험이 있어,

다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곳에 학천정(鶴泉亭)을 새로 짓고 이전하여 후학들을 길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루위에 올려져 있는 편액들로,

송병준(淵齋 宋秉濬:1836-1905)의 “학천정(鶴泉亭)”에서는,

“이재 선생의 유풍을 따르는 후학들이 선생에 대한 흠모의 정을 높이 평가하며  정자가 도의를 계승하는 강학의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상기하며,

인욕이 극성 하는 세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존속되기 바라는 마음을 기록하기 위해서 기문을 쓴다.” 라고 표현하였으며,

이재(李縡)의 후손 직양재 이만용( 直養齋 李萬用: 1839-1915)은 그의 “학천정기(鶴泉亭記)“에서 학천정 경관에 대해,

“이 정자에 오르면 푸른 바위절벽에 광채가 드리우고, 꽃나무의 짙은 향기가 퍼지며 촛대같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두 손 모아 예를 표시하며 반짝인다.

솥처럼 패인 연못과 씻은 듯한 계곡이 회오리치며 흐른다.

이 물이 맑으면 그윽하고 푸르러 기이하고 뛰어난 경관을 일으키니 어찌 사람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랴. 이는 분명 하늘이 만든 것이로다.

샘 위에 학대(鶴臺)가 있어 예부터 학천(鶴泉)이라 하였으되, 이에 이 정자의 이름을 학천정(鶴泉亭)이라 붙인다.”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정자의 앞으로는 옥석대(玉舃臺)의 계류가 가까이 있고,

뒤로는 커다란 암벽이 서있어 좁아 보이나 외선유동(外仙遊洞)의 풍광을 즐기기엔 그만입니다.

 

 

 

정면 3칸의 학천정 뒤편에 병풍처럼 서있는 암벽은 정자의 옆까지 나와 있는데,

 

 

 

그곳에서도 내용은 알수 없지만 자취를 남기고 싶어했던 옛사람들의 흔적을 볼수 있습니다.

 

 

 

학천정(鶴泉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은 네 귀에 추녀를 달았으며 담장은 돌막담장에 시멘트 기와로 사당을 포함하여 일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아일체(物我一體)로 자연과 벗하였던 선비들의 심신수련처인 별서명승(別墅名勝)으로,

외선유동(外仙遊洞)의 정점인 제9곡 옥석대(玉舃臺)의 경승에 자리한 아름다운 정자 경북 문경의 "학천정(鶴泉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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