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의 송시열 유적(宋時烈 遺蹟)을 찾아서,

암서재(巖棲齋)에 이어서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일대를 돌아 보았습니다.

 

주차장이 있는 속리산 국립공원 화양동계곡 탐방지원 센타에서 조금만 걸으면,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을 만나게 되고..

 

 

 

운영담에서 지척인 거리에 함께있는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찾을수 있습니다.

 

 

 

화양서원(華陽書院) 입구의 맞은편에는 4개의 비석이 서있는데,

비석에는 읍궁암에 얽힌 사연이 기록돼 있으며 비석의 내용이 네 개 모두 동일한데,

똑같은 비석이 여러 개 존재하는 것은 물에 떠내려갈 때마다 새로운 비석을 만들었기 때문이라 하며,

그중 왼쪽의 비석이 유난히 흰게 보이는것이 제작 시기는 가장 이른 것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이 비석의 보존 상태가 좋은 까닭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2010년 발견해 다시세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석군 뒤로 계곡을 향해 구멍이 펴여 넓게 누워있는 바위가 있어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으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북벌(北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의 젊은나이에 승하(昇遐)한 효종(孝宗) 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효종의 기일에 바위에 올라 서울쪽으로 향해 활처럼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하여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려졌다고 합니다.

 

 

 

화양계곡의 읍궁암 윗쪽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인 "화양서원 묘정비(華陽書院 廟庭碑)"가 있어,

묘정비(廟庭碑)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과 모시는 주인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으로,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숙종 42년(1716)에 세웠으며 비문은 윤봉구(尹鳳九)가 지었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모아 새겼으며 두전(頭篆) 역시 옥저전(玉箸篆)을 모아 새겼는데,

1870년(고종 7)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에 따라 건물이 헐리게 되면서 비 또한 매몰되었다가 광복 후 찾아 다시 세웠습니다.

 

 

 

계곡을 따라 위쪽의 계곡 건너에 화양구곡(華陽九曲) 제4곡인 금사담(金沙潭)이 있어,

화양구곡의 백미인 금사담에 암서재(巖棲齋)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암서재(巖棲齋)는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서 은퇴한 후 59세(1666)때 지은 서재 겸 정자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대한민국의 명승 제110호로 지정된 화양구곡의 백미 이기도 합니다.

 

 

 

암서재(巖棲齋)에서 안내문이 있는곳으로 되돌아와  송시열 유적(槐山 宋時烈 遺蹟)의 배치를 살펴보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숙종22년(1696) 9월 사액서원이 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철거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3년 복원하였는데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였다고 합니다.

 

 

 

국보 제239호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초상화(국립박물관 소장)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던 노론의 영수로 정치 사상계의 거장으로 유림 위에 군림한 인물로,

숙종 15년(1689) 왕세자 책봉을 둘러싼 놀란 끝에 노론(老論)이 밀려나고 남인(南人)이 집권하는 사건인 기사환국)이 일어나,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83세의 노구(老軀)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숙종 20년(1694)에 노론이 다시 실권을 쥐면서 송시열은 복권 되어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많이 세워졌고,

사액서원만도 서른일곱 군데에 이르렀는데 이곳 화양서원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서원으로 노론 사림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서원을 들어서면 서원철폐 이전에 사용했던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석물들이 보이고,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들어서면 다른서원들과의 다른 배치형태를 보여주는데,

입구에는 누각이 없으며 보통은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 것에 비해 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은 굳이 북향하여 지었는데,

이는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 로,

단순히 국가 존망의 위기에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로 북쪽을 향해 지었다고 전합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존사청이 있으며,

 

 

 

다음으로 풍천재(風泉齋)가 자리해 있어,

 

 

 

풍천재의 현판이며,

 

 

 

풍천재에 대한 설명문이 없어 알수는 없으나,

이곳의 관리사나 제례때 제관들의 공간으로 보여집니다.

 

 

 

풍천재의 마루쪽 방문은 사합문의 들문으로 되어있는 모습도 보이고..

 

 

 

존사청과 함께 제사를 준비하는 증반청을 지나 왼쪽의 화양서원(華陽書院)으로 향합니다.

 

 

 

사당앞 "세 성현을 잇는다"는 의미의 솟을 삼문인 승삼문(承三門)이 있고,

정면3칸 측면 2칸 겹처마의 맞배지붕의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사당으로 중앙에 송시열의 영정을 모셨다고 하나 들어가 볼수는 없습니다.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조선 숙종 22년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원으로 창건된 해에 편액을 받았으며,

숙종 42년 어필로 현판을 달았으며 전국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였으나,

제수전(祭需錢)의 봉납을 강요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심하여 철종 9년(1858)에 폐쇄되었으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리었는데 "화양(華陽)"은 "중국 문화가 햇빛처럼 빛난다"는 뜻도 있습니다.

 

 

 

서원에서 증반청을 지나 만동묘(萬東廟)로 오르는 삼문으로,

 

 

 

만동묘로 들어가는 두개의 문 가운에 앞서 있는 양추문(陽秋門)이며,

 

 

 

정문에 해당되는 양추문(陽秋門)을 지나면 내삼문 사이의 넓은 공간에 계단이 설치돼 있어,

계단은 5개, 3개, 5개, 3개, 5개, 9개씩 층을 이루는데 5는 오방(五方), 3은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며 9는 가장 큰 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오른쪽에는 충북 기념물 제25인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가 있어,

비(碑)는 만동묘를 세우게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으로,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비문은,

영조의 사부로 대사헌을 거처(영조38년 9월 9일 戊辰조) 공조판서(영조39년 3월 3일 庚申조)를 역임한,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 12. 21)가 지었는데,

묘정비(廟庭碑)에는 새겨 놓은 글자들을 모두 정으로 쪼아낸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일제가 훼손한 흔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만동묘(萬東廟) 계단에는 흥선대원군의 일화가 유명한데,

다양하게 각색되어 전해지는 일화 가운데 하나는 권좌에 오르기전 대원군이,

부축을 받으며 만동묘 계단을 오르다 이곳 묘지기 발길에 차여 나동그라졌다는 이야기로,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권력기반이 확고해지자 만동묘의 제사를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복수했고,

우암을 제향하는 화양서원을 포함해 650개 남짓하던 서원을 대부분 훼철하고 47개 사액 서원만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긍정적 기능을 발휘하던 서원이 지연·학연·당파의 거점으로 떠오르면서 병폐가 커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무엇보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조선 후기 권력을 독점한 서인(西人)의 정치적 성지(聖地)로 군립하여,

묘지기 조차 파락호(破落戶) 시절의 대원군쯤이 눈에 보일 리 있었겠느냐고 만동묘(萬東廟) 일화는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원군 일화는 실제 그랬다기보다 위험한 계단에서 국왕의 종친(宗親)에게 묘지기가 발길질을 서슴없이 해댔다는 이야기를,

세상이 믿을 만큼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우회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데,

만동묘의  계단은 비정상적인 만큼 가파르고 발을 딛는 바닥도 너무 좁기 때문에 누구나 엉거주춤한 게걸음으로 오르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풍수지리적 설계라는 주장도 있지만 참배자에게 경건한 자세를 요구하고자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 조금 더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가파른 계단을 딛고 조심스럽게 오르면 내삼문인 성공문에 이르고,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만동묘(萬東廟)에 이르게 되어,

 

 

 

만동묘(萬東廟)의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준말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하나인 순자(荀子)가 사용한 말로써,

"중원의 젖줄인 황하(黃河)는 수만 번 물길을 꺾어 흐르지만 결국은 동쪽을 향한다"는 의미인데,

중국에선 충신의 절개를 가리키는 이 말이 조선의 중화주의자들에겐 중국 황제를 향한 변함없는 충절을 뜻하게 되었는데,

강물이 결국은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는 인식부터가 철저히 중화주의적인 발상 입니다.

 

 

 

만동묘(萬東廟)의 현판이며,

 

 

 

우암(尤菴)과 그의 제자들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해버린 마당에 중화문명을 지켜낼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다면서,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경영하며 화양구곡의 큰 바위에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글씨를 새기는 등을 통해,

화양구곡(華陽九曲)을 중화문명의 성지(聖地)로 만들고자 했으며,

 

 

 

만동묘(萬東廟)는 송시열이 죽음을 앞두고 유배를 가는 길에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에게,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우(祠宇)를 세워 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明)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숙종 29년(1703)에 세운 사당입니다.

 

 

 

만동묘(萬東廟) 일원은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일본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여 유지만 남아있던 것을,

근자에 괴산군에서  2003년 비각과 함께 건물을 복원하였습니다.

 

 

 

조선조 중국의 명나라는 쇠퇴하고 청나라가 일어서면서 청은 명나라를 치기 전 조선을 두 번 침략했고,

조선은 두 번의 전쟁에서 패전했으면서도 청을 오랑캐로 보았으며 비록 망했지만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명나라를 문명국으로 보고 따랐는데,

이런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 안질과 각질에 걸렸는데 그는 주자도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병을 번거로워하기보다는 영광으로 여겼으며,

약혼한 손녀가 혼사 전에 죽은 것 역시 슬퍼하는 한편으로 주자에게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을 정도로,

주자의 모든 것을 종교처럼 받아들이고 맹신했던 철저히 중화주의적인 성리학의 거두로,

그의 염원이 담겨있는 괴산 송시열 유적(槐山 宋時烈 遺蹟)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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