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군위와 의성지역을 여행하면서,

군위군 소보면 내의리에 있는 정자 문화재인 양암정(兩岩亭)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6호인 양암정(兩岩亭)으로,

동서남이 탁 트인 위천(渭川) 옆 바위 언덕 위에 한 마리의 왜가리 앉은 듯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어,

 

 

 

양암정(兩岩亭)은 "한국조경학회"가 우리나라 최고의 명 정자터라고 소개했을 만큼 건물과 주변 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곳으로,

멀리서 살펴보면 위천이 활처럼 휘어진 물굽이의 가장 굽은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산자락이 튀어나온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내의교 방향에서 흘러오는 위천(渭川)이 바위를 "충"하고(부딪치고) 있음을 알수 있는데,

충은 풍수에서는 칼끝과 같다하여 음택과 양택의 입지로는 제한되는 곳이지만,

이처럼 돌출된 곳은 경치가 뛰어나며 먼 곳을 살필 수 있는 장점이 있기에 정자의 터로는 명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암정(兩岩亭)으로 들어가는 길은 보통 정자에 들어가는것과는 다르게 해두어,

이유는 알수 없으나  흙과 돌로 담장을 둘러놓아 통로를 만들어 두었는데,

정자의 옆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돌아 정면으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어,

 

 

 

담장과 담장사이로 나있는 길을따라 들어가면 일각문이 보이고,

 

 

 

내담장과 외담장이 나누어지는 부분 아래에 바위가 있어,

바위 아래에는 양암대(兩岩臺)라고 암각된 글씨를 불수 있는데,

글씨가 묻힐듯 지면과 가까이 있어 세월의 흐름으로 바위의 일부가 땅에 묻혀진것으로 보입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양암정(兩岩亭) 바로앞에 서있어,

 

 

 

양암정(兩岩亭)은 조선 광해군 4년(1612)에 서담(西潭) 홍위(洪瑋:1559∼1624)가,

자연을 즐기면서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고종 5년(1868)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고종 25년(1888)에 다시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양암정(兩岩亭)의 현판으로,

한때 현판위에 새가 둥지를 틀었던 흔적도 보입니다.

 

 

 

비교적 낮은 마루와 잘다듬어 그위에 세운 주초에 기둥이 있어 마루와 만나는 모습이며,

 

 

 

양암정(兩岩亭)의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정자의 가운데의 후면에 방을 두어,

 

 

 

방의 내부로 뒷면은 벽을 두었고 마루가 있는 삼면은 문을 두어 밝은편 입니다.

 

 

 

정자의 규모는 아담하며 나무의 모양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린모습이 소박하게 느껴 집니다.

 

 

 

마루 위에는 양암정상량문(兩岩亭(上樑文)의 편액이 있으며,

 

 

 

양암정중건기(兩岩亭重建記)와,

 

 

 

양암정기(兩岩亭記)의 편액도 있는데,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부분도 있고 보수가 필요한 편액도 보입니다.

 

 

 

정자는 천연암반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워,

전면에는 둥근 기둥을 측면에는 팔각기둥을 배면과 방이 있는 내진주에는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이렇게 세가지 기둥을 세운 건물은 아주 드믈어 작은 규모의 정자 이지만 "천지인(天地人)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

"원은 하늘을, 네모는 땅을, 팔각은 사람을 나타내는것"으로 도학에 근거하여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양암정(兩岩亭)의 마루에서 군위의 젖줄인 위천(渭川)을 내어다 봅니다.

 

 

 

이곳을 노래한 양암정 제영시(兩岩亭 題詠詩)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新亭蕭灑壓虛汀        새로 지은 정자 상쾌하고 깨끗하여 빈 모래톱을 누르는데 

仰想先靈陟降形        선조들의 넋이 오르내리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우러르네. 

杖?百年芬馥紫         백년세월 지팡이 짚고 걸으신 곳엔 꽃다운 향기 붉었는데 

摩?當日蘚痕靑         오늘에야 더듬어 찾아가니 이끼 낀 자국이 푸르네. 

風節姑看富春暮       계절을 잠시 바라보니 풍요로운 봄날이 저무는데 

品題不入平原醒       온갖 시제가 떠오르지 않음을 평원에서 깨닫네. 

擬將模寫歌其事       계획하건대, 장차 그 사적(事蹟)을 본떠 노래하려 하는데 

筆舌追來不暫停       붓이 혀를 쫓아와서 잠시도 멈추지 않네.

 

 

 

양암정(兩岩亭)은 삼면의 마루가 방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런 구조의 정자는 경상도 지역에서는 찾기 힘드나 전라도 충청도의 일부 지방에서는 흔이 볼수있는 구조입니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 이라고는 하나 작은 규모의 아담한 팔작 기와집으로,

일각을 이루는 담장 안에서는 렌즈안에 양암정(兩岩亭)을 담을수 없을 정도이며 앞마당도 좁은편 입니다.

 

 

 

양암정(兩岩亭)의 주인인 홍위(洪瑋:1559[명종 14]∼1624[인조 2])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위부(偉夫)  호는 서담(西潭)으로 군위에서 출생하여,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부모를 정성껏 보호하였으며,

이듬해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수천언의 척화토적책(斥和討賊策)을 진언(陳言)하여 크게 참고하게 하였습니다.

1601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지평·예조좌랑·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통제영종사관(統制營從事官)으로 선임되어 통제사를 보좌하여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전비를 강화하는 데 공이 컸습니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춘추관기사관·세자시강원사서·정언·지평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직언으로 시사를 바로잡았으나,

광해군대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생교육에 힘썼습니다.

그 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가 병조정랑·예천군수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으며,

정경세(鄭經世)·장현광(張顯光) 등과 친교가 두터웠고 저서로는 "서담집"이 있습니다.

 

 

 

절벽과 숲으로 둘러싸여 아래로 푸른색을 반짝이며 고이듯 흐르는 위천(渭川)이 내려다 보이며,

강건너 은빛갈대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여,

자연과 벗하면서 망중한과 안빈낙도를 즐긴 서담(西潭) 홍위(洪瑋)의 흥취와 작고 소박한 공간 이기에,

정자의 주인은 그 자신을 내려놓고 풍류를 즐겼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곳으로..

여름철에는 물놀이에 좋은 유원지로도 좋은곳여셔 아는이들만 찾는다는 곳이기도 한,

서담 홍위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칠탄숙강당(七灘塾講堂)도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어,

함께 찾아볼만한 곳으로 군위의 정자 문화재 양암정(兩岩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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