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다녀오면서 마비정 벽화마을에 이어서,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를 찾았습니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남평문씨의 씨족마을로,

"마비정 벽화마을"의 아랫쪽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 절이 있었던 명당 터를 활용해 산 밑의 양지바르고 아늑한 장소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천내천이 흐르고 있어 명당의 기본적인 요건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 입니다. 

 

 

 

대구광역시 시도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로,

입구에서는 넓은 목화밭을 만나게 되는데 이 마을은 조선 말기의 양반가옥 9동과 별당(別堂)양식의 정자 2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들은 건축연대가 200년 미만이나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정미(精微)한 고졸미(古拙美)를 갖추고 있는데,

특히 계획된 도로망과 격조 높은 흙담이 건물을 에워싸면서 주위의 산야(山野)와도 잘 조화되고 있으며,

당내친(堂內親)인 대소가(大小家)가 큰집의 앞과 좌우에 새집을 지어 분가한 건물 배치는 매우 이채로운데,

최소 규모의 씨족 마을로,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곳에 자리잡은 남평문씨(南平文氏)는 목화씨를 들여온 고려시대의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의 후손여서,

목화로 문중의 내력을 알려주는듯 합니다.

 

 

 

목화밭의 좌측에 인공연못도 조성이 되어 있어,

인흥원(仁興園) 이라는 연못으로 경주 안압지를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남평문씨가 누대에 세거(世居)해온 전형적인 동성촌락(同姓村落)으로,

문익점의 18세손 인산재 문경호(仁山齋 文敬鎬, 1812년-1923년)가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1834년에,

지금의 광거당 터에 용호재라는 재실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1940년대에 거의 지금과 같은 아홉 채의 한옥과 2채의 재실을 갖춘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때 남평 문씨들은 50만 평의 토지와 만석꾼에 가까운 막강한 부를 쌓아 올렸고,

그 경제력 바탕 위에 일만 평 대지 위에 고래등과 같은 기와집을 지었습니다.

 

 

 

목화밭을 건너 오른쪽에는 세거지 이전에 있었던 인흥사지3층석탑의 유구가 남아 있어,

 

 

 

인흥사라는 절이 있었던곳임을 알려주는 인흥사지 석탑 (仁興寺址 石塔)으로,

인흥사(仁興寺)는 일연(一然) 스님이 11년간 머무르며 "삼국유사"의 역대연표와 불경을 편찬한 큰규모의 이름 높은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불에 타 없어져 폐사 되었는데 남아있는 탑으로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삼층석탑으로 전합니다.

 

 

 

뒤쪽에 따로이 있는 광거당(廣居堂)을 먼저 찾았으나 문이 닫혀있어,

수백당(守白堂)을 찾았습니다.

 

 

 

수백당(守白堂)으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은 문이 닫혀 있지만,

오른쪽의 협문을 통하여 들어갈수 있어,

 

 

 

협문을 들어서면 건물한채가 있어,

비어있는 집으로 보이는 이곳은 생활공간이라는 표지가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만 합니다.

 

 

 

왼쪽에 또하나의 협문이 나오고 안내문이 있어 들어가는곳임을 알수 있는데,

 

 

 

정중한 부탁의 글을 문에서 볼수 있고..

 

 

 

문을 들어서면 수백당(守白堂)의 전경이 들어오고,

 

 

 

협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건물 앞쪽에 마루를 설치하고 뒤쪽으로는 5칸의 방과 1칸의 누마루를 둔 수백당(守白堂)을 만날수 있어,

이곳은 강수연 주연의 유명했던 영화 "씨받이"의 촬영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결백을 지키는 집"이란 의미의 수백당(守白堂) 현판으로,

우당(愚堂) 유창환(兪昌煥,1870~1935)의 예서체로 결구미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 합니다.

 

 

 

수백당(守白堂)으로 오르는 계단은 오래된 모습은 아니지만 공력을 들인 모습이고,

 

 

 

사가의 건물로는 규모가 있는 편여서 앞쪽에 나있는 마루도 길어 보이며.

 

 

 

마루끝에 보이는 "이청각(履淸閣)"의 현판으로,

중국 명나라의 서예 문인 화가 문징명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마루에는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사분합문(四分閤門)의 모습을 볼수있어,

중간에 마루방이 있슴을 짐작하게 하고,

 

 

 

사분합문(四分閤門) 위에는 채광을 위한 창이 따로 나있어 조선후기의 양식을 엿볼수 있습니다.

 

 

 

수백당으로 들어오는 솟을 대문의 문간채가 보이고,

수백당(守白堂)은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일족의 모임도 열던 큰 건물로,

 1936년 일제때 문 영박(文永樸 : 1880∼1930)의 인격과 학식을 기리고 후손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한 교육 장소로서 자제들이 건립하였으며,

 

 

 

대문채와 수백당사이에는 이광원(彛光園)이라는 이름의 정원이 있어,

이광원(彛光園)은 "언제나 떳떳이 변하지 않고 빛나는 정원"이라는 의미로,

왼쪽 마당에는 작은 산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으로 정원으로 꾸며놓아,

거북 모양의 괴석(怪石)과 두 그루의 커다란 소나무와 모과나무 배롱나무 등을 심어 자연 속에 있는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는데,

동산은 마당 한 가운데 배치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게 않도록 꾸미는 동양적 정원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한국 전통 정원으로 꾸며두었습니다.

 

 

 

담장까지 이어져 있는 정원에서 보이는 굴뚝도 정원과 어울립니다.

 

 

 

수백당(守白堂)의 누마루 쪽으로 나와 봅니다.

 

 

 

수백당의 누마루에 걸려있는 사백루(思白樓)의 현판 또한,

이청각(履淸閣)의 현판과 같이 문징명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한 글씨로 보여지며,

 

 

 

누마루의 아래에는,

무덤 지키는 석물인 문인석으로 보이는 2기가 보입니다.

 

 

 

수백당(守白堂)의 뒤편에는 경귀당(敬䢜堂)의 현판이 있어,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葦滄) 오세창(呉世昌,1864∼1953)의 글씨이며,

 

 

 

수백당(守白堂)의 뒤편에서 계자난간을 돌린 누마루를 살펴봅니다.

 

 

 

수백당(守白堂)의 뒤에도 단을 달리하여 쪽마루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뒤편 마루의 중간에도 현판이 있어,

쾌활(快活)의 현판으로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듯 보입니다.

 

 

 

마루 아래에서 군불을 넣는 아궁이의 모습도 보이고,

 

 

 

기대듯 담장겯에 있는 기와자붕의 굴뚝이 서있으며,

 

 

 

수백당(守白堂)의 뒤에는 사당으로 보이는곳이 있으나 닫혀있어,

 

 

 

수백당(守白堂)의 누마루를 따라 마당으로 다시 나옵니다.

수백당(守白堂)은 일제 시대에 건립한 건물로 전통 한옥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데,

조선의 건물은 철저히 천원지방 (天圓地方) 사상을 지켜 궁궐과 관청의 건물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일반 한옥은 네모진 기둥으로만 세워야 했는데 수백당은 둥근 기둥으로 세웠고,

건물의 규모에 비해서 기둥의 수와 대들보가 훨씬 더 많고 굵직굵직하며 수백당이 자리한 이곳은 인흥사의 대웅전 터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수백당(守白堂)의 오른쪽에 서고(書庫)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어,

 

 

 

書庫(서고)로 들어가는 유예문(遊藝門)의 현판이며,

 

 

 

유예문을 들어서면 3개의 건물이 "ㄷ"자 형태로 문을 향하여 자리해 있습니다.

 

 

 

유예문과 마주하며 중앙에는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있어,

 

 

 

인수문고(仁壽文庫)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1만여권의 도서와 문중의 보물을 보존하던 건물로,

처음에는 소규모이던 인수문고는 서고를 후에 크게 지었다고 합니다.

 

 

 

인수문고의 오른쪽에는 중곡서고(中谷書庫)가 있어,

 

 

 

중곡서고(中谷書庫)의 현판이며,

 

 

 

인수문고의 왼쪽에는 거경서사(居敬書舍)가 자리해있어,

 

 

 

거경서사(居敬書舍)의 현판으로,

 

 

 

3동의 서고(書庫)는 모두 문이 닫혀 들어가 볼수 없어서 아위움이 남았는데,

 

 

 

서고(書庫)가 있는 이곳은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의 기초를 쓴 인흥사지의 장경각자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는 거주민의 불편 때문인지 모두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볼수 없었으며,

수백당(守白堂) 일원만 유일하게 개방이 되어 있어 담장을 따라 한바퀴 도는것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죽헌 고택 앞에는 300년 수령에 높이가 12m정도되는 회화나무가 있어,

이 나무는 남평문씨 본리 입향조(入鄕祖)를 기리기 위하여 문경호(文敬鎬) 나무'라 이름 지었으며,

일명 선비나무 혹은 학자나무라고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죽헌종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의 모습으로,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는 개방되어 있는곳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옛 담장을따라 거닐어 보는것도 좋으며 여름에는 담장위의 능소화로 인기가 좋은곳 입니다.

 

 

광거당(廣居堂)과 수백당(守白堂)은 일제 식민지라는 혹독한 시련기에도,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모여들어 학문과 예술의 꽃을 피웠으며 사라져가는 조선 양반의 자부심과 권위를 떨친 곳으로,

서고(書庫)와 광거당(廣居堂)은 닫혀있어 볼수없는 아쉬움으로 남은,

대구 화원의 "남평문씨본리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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