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의 고장 경북 안동을 여행하면서,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문화재인,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를 찾았습니다. 

 

안동(安東)은 한국 유교문화의 본고장이며 전통문화 유산이 풍부한 고장으로,

수많은 조선시대 건물과 민속품은 전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곳 이기도 합니다.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의 모습으로,

광풍정(光風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풍정(光風亭) 옆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경당 장선생 유허비(敬堂 張先生 遺墟碑)"가 서있고,

 

 

 

광풍정(光風亭)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김성일ㆍ유성룡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바 있는,

장흥효(張興孝 1564∼1633)가 1630년대에 초당으로 건립한 누각으로,

헌종 4년(1848년)에 이 지역 유림들이 새롭게 고친 건물로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조선 중기 대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가 300여 문인에게 강학(講學)하던 유서 깊은 정자 입니다.

 

 

 

 

환경친화적으로 지어진 정자인 광풍정(光風亭)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북동향하고 있으며,

좌측에 전퇴(前退)를 들인 전후 1.5칸통의 온돌방을 두고 그 우측으로는 앞뒤 각 1칸씩의 마루 및 온돌방과 앞뒤 2칸통의 마루를 놓았고,

우측으로 가면서 마루 공간을 점차 넓혀 정자 건축의 특징인 개방성을 더해 주고 있으며,

전면의 누하주는 자연석 기단 위에 큼직한 덤벙 초석을 놓고 팔각기둥을 세웠으며,

팔각 누하주 위에는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둥 상부에는 주두를 얹고 주간에는 소로로 수장한 5량가의 소로수장집으로 합보한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행공을 끼운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와 외기틀을 받게 하고 홑처마 팔작지붕을 얹었습니다.

 

 

 

광풍정(光風亭)은 전체적으로 마루공간과 온돌방이 대각선으로 구성된 듯한 독특한 정자건축으로,

이는 하절기의 외부환경을 최대한 배려한 환경친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면의 루하주는 막돌기단위에 큼직한 덤벙주초를 놓고 팔각주를 세웠으며 루상주는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나,

나머지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으며 5량가의 납도리집으로 대량위의 동자주는 판대공에 첨차ㆍ소로 놓고 중도리와 종량을 결구하고,

그 위에 판대공 없이 첨차ㆍ소로 놓고 마루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으며 천장은 제고물반자로 치장하고 마루는 우물청판을 깔았고,

주두에 결구된 평방위에는 소로를 얹어 주심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습니다.

 

 

 

광풍정(光風亭)의 현판으로,

"광풍(光風)"은 북송(北宋)의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의 인품을 추앙하면서 쓴 글인,

황정견의 예장집(豫章集) "염계시서(濂溪詩序)"에 나오는 "광풍제월(光風霽月)"로, 

용릉(舂陵) 주무숙(周茂叔, 또는 주돈이(周敦頤))은,

"그 인품이 고상하고 마음이 대범한 것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과 같다(舂陵周茂叔, 其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는,

고사에서 찾을수 있는데 "광풍제월 (光風霽月)"은 "뜻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이란 말로,

훌륭한 인품을 비유하여 쓰는 말인데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입니다.

 

 

 

광풍정(光風亭)의 마루에는 시판외 몇개의 편액이 올려져 있으며,

 

 

 

장흥효(張興孝)의 요청으로 인재(訒齋) 최현(崔哯)이 쓴 경당기(敬堂記)가 있고,

 

 

 

이병원(李秉遠)의 광풍정 중건기(光風亭重建記)가 있으며,

 

 

 

장흥효(張興孝)의 후손이 쓴 광풍정 중건운(光風亭重建韻)도 볼수 있으며,

 

 

 

백록동규(白鹿洞規)의 편액으로,

백록동규(白鹿洞規)는 중국 강남성 여산(廬山)에 있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주자(朱子)가 강학을 하면서 학칙(學則)으로 오륜(五倫)이 유학의 근본 목적임을 확인하고,

배우는 순서로 이치를 탐구하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과,

몸을 닦는 일부터 사물에 접하는 것까지 모든 실천을 포괄하는 독행(篤行) 등 다섯 항목을 들고 있어,

이 규범은 주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에 근원을 두고 이치를 규명하고,

열심히 실천하여 심법(心法)의 절실하고 요긴한 것을 구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정자의 방문이 열려 있어 안쪽을 들여다 보고..

 

 

 

광풍정(光風亭) 마루에서 앞을 내려다 봅니다.

 

 

 

정자는 일반적으로 주위 자연 경관은 경치가 매우 뛰어난곳에 자리하여,

길 가던 나그네가 쉼터의 공간으로도 쓰였으며, 유희를 즐기기도 하였고, 여름에는 시원한 낮잠을 즐길 용도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광풍정(光風亭)은 풍류를 즐기는 곳이라기 보다는 강학의 공간으로 많은 후인들을 배출한 곳입니다.

 

 

 

마루에서 내려와 온돌방에 불을 넣은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아궁이의 모습도 살펴보고,

 

 

 

얼마전 개보수를 한듯 광풍정(光風亭)의 뒷쪽도 살펴봅니다.

 

 

 

광풍정 뒤에는 높은 암벽위에 제월대(霽月臺)가 있어 올라 봅니다.

 

 

 

광풍정(光風亭)의 주인인 장흥효(張興孝)의 본관은 안동, 자는 행원(行源), 호는 경당(敬堂)으로,

부장(部長) 장팽수(張彭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김성일(金誠一), 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한후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으나,

장흥효는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등에게 학문을 전하였는데,

평생을 처사로 일관한 인물로 유일로 천거되는 것 조차 싫어 일부러 과거에 응시해서 낙방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1633년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교지가 도착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지평에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경당문집(敬堂文集)』이 있습니다.

 

 

 

장흥효(張興孝)는 광풍정 뒤편의 암벽을 제월대(霽月臺)라 명명했는데,

이는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이 북송의 대 성리학자 주돈(周敦)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속의 맑고 깨끗함이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따온 것이라 전합니다.

 

 

 

푸른 이끼로 덮인 거대한 암반위에 날아 오를듯 자리란 제월대(霽月臺)로,

경당(敬堂)이 광풍정에서 강학이 끝나면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올라 시를 읊곤 했던곳을,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유허를 기려 후대에 지은 건물 입니다.

 

 

 

왼쪽의 협칸을 통하여 제월대(霽月臺)의 마루로 오를수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방은 들이지 않고 마루만 있는 누각형의 제월대(霽月臺)로,

 

 

 

제월대(霽月臺)의 현판이며,

 

 

 

마루에는 제월당기(霽月堂記)외 하나의 편액을 볼수 있으며,

 

 

 

경당(敬堂)의 "나와 남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예문"을 찾아 봅니다.

欲己多而欲人少者, 有己故也           나는 많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적기를 바라는 것은 곧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無己, 則欲誰多而欲誰少                 내가 없어진다면 누구는 많기를 바라며 또한 누구는 적기를 바랄 것인가

欲己勝而欲人不勝者, 亦有己故也     자신이 이기기를 바라고 남이 지기를 바라는 것 또한 내가 있기 때문이다

無己, 則欲誰勝而欲誰不勝              내가 없다면 누구는 이기기를 바라며 누구는 지기를 바랄 것인가나

己亦人, 人亦己, 己亦天,                  또한 저 사람이고 저 사람 또한 나이니 무엇을 뽐낼 것이 있겠으며

天亦己, 何怨尤之有                       나 또한 하늘이며 하늘 또한 나이니 무엇을 탓할 것이 있겠는가

 

 

 

푸른 송림안 높은 기암위에 자리한 제월대(霽月臺)로,

 

 

 

제월대(霽月臺) 마루에서 앞을 내려다 보면,

 

 

 

마을을 비롯하여 논밭과 앞산의 풍경이 시원하게 들어 옵니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의마(意馬)"라는 글 입니다.

人鬼關頭有一馬    사람 되고 귀신 되는 관문 머리에 생각이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殊異尋常之 者      이 말은 보통 말과는 다르다네

或由其道或不由    혹 길 따라 가기도 하고,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는데 늘 단전(丹田)의 들녘에서 출발함을 보겠네

惺惺主翁乘此馬    성성주인(惺惺主人: 마음)이 이 말을 타면

一日不可須臾捨    하루 중에 잠시도 머물지를 않는다네

苟或俄頃不察幾    만약 혹 잠깐이라도 기미를 못 살피면

千里橫奔難力把    천리만리로 마음대로 달아나 애써 잡기 어렵다네

경당(敬堂)은 "의마(意馬)"라는 이 글에서 경(敬)을 통해 진실무망(眞實無妄)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삐를 놓으면 천리만리를 달아나는 말을 다루듯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함을 "매견발단전야(每見發丹田野)"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월대(霽月臺)에서 내려와,

왼쪽 인근에 있는 칠계재(七戒齋)로 발걸음을 잡습니다.

 

 

 

해질녘에 찾은 칠계재(七戒齋)로,

칠계재는 조선 후기 장세규(張世奎, 1783~1868)가 건립한 조선 후기의 고택으로,

사랑채는 일반적인 ‘ㅁ’자형 건물과 마찬가지로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2칸 크기인 방 1개와 1칸의 마루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고, 사랑채의 출입문은 각 칸마다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랑채에서 볼수있는 칠계재(七戒齋)의 현판이며,

 

 

 

안채로 들어가는 칠계재(七戒齋)에는 한옥스테이의 표지도 보입니다.

 

 

 

칠계재(七戒齋)의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4칸 크기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안채의 정면 5칸 중 중앙의 3칸은 대청이었는데 지금은 왼쪽 협간에 방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어 2칸이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안마당에서 볼 때 제일 좌측 칸에 안방이 있는데 아래쪽의 1칸을 터서 크기는 2칸통으로,

안방을 기준으로 하여 위쪽에 방을 하나 내어 뒷방으로 사용하였으며, 아래쪽으로는 2칸의 부엌이 있는 구조 입니다.

 

 

 

해가 떨어지고 안채에는 불빛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 보질 못하고,

사랑채를 돌아 연결된 안채의 뒷부분만 돌아 봅니다.

 

 

 

칠계재(七戒齋) 옆에 서있는 칠계재(七戒齋)와 안동장씨 400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비석인 사적비(事跡碑)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

 

300여 문인이 찾았던 유서 깊은 정자로,

지형적인 환경 요인 뿐 아니라 기후 요인까지 적절히 받아들인 건축물로서 건축사적 의의가 크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쓰며 후학에 힘쓴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자취를 돌아 볼수있는 곳으로

안동 서후의 문화재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霽月臺) 그리고 칠계재(七戒齋)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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