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논산으로의 문화재 탐방길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된 정자문화재,

논산 임리정(臨履亭)을 찾았습니다.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자 임리정(臨履亭)으로,

 

 

 

임리정(臨履亭)은 "죽림서원"에서 사당 옆으로 나있는 대나무 숲길을 오르면 만날수 있는데,

그림으로 보았을때 한참을 올라가야 할것 같지만..

 

 

 

잠깐이면 오를수 있는 아주 짧은 대나무 숲길위에 자리해 있습니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임리정(臨履亭)"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건립하여 후학들에게 강학하던 곳으로,

원래는 황산정(黃山亭)이라고 하였으나 정자 앞에있는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에 의하면,

『시경』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 것같이 하라”는 구절을 따라,

임리정(臨履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문화재 안내문에 있는 임리정(臨履亭)의 모습이며,

 

 

 

정자로 들어가는 입구앞에는 임리정의 사적비(事跡碑)가 서있고,

 

 

 

임리정(臨履亭) 앞에는 돌기둥의 든든하게지은 비각이 있어,

 

 

 

비각 안에는 1875년(고종 12)에 세웠다는 "임리정기비(臨履亭記碑)"로,

비문은 김상현(金尙鉉)이 찬(讚)하고 김영목(金永穆)이 서(書)하였습니다.

 

 

 

임리정(臨履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건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며 정면은 기둥 사이를 동일한 간격으로 나누고,

그중 왼쪽의 2칸을 마루로 깔아 대청으로 하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고,

온돌방 전면에는 반 칸을 안으로 들여 상부는 누마루로 하부는 함실아궁이로 만들었으며,

기둥은 둥근기둥이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배치하였고, 초익공식 공포를 올렸습니다.

 

 

 

정자의 주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한양 출신으로,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장성하여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에게 사사했습니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에 천거 되었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명나라 사행(使行)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한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으며,

이어 순릉참봉·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동몽교관·통례원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으로서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습니다.

그뒤 남양부사와 안성군수를 거쳐 1600년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으며 1602년에 청백리에 뽑히고,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으나 북인(北人)이 득세하게 되자 1605년 벼슬을 버리고 연산으로 낙향 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잠시 회양·철원부사를 지냈는데,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모를 꾀했다 하여,

사사되거나 옥에 갇힌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장령에 오르고, 이어 성균사업(成均司業)·집의·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면서,

원자(元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으며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천거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이어 부호군을 거쳐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습니다.

다음해 다시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워 이이,성혼을 제향했으며,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龍?衛副司直)으로 옮겼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는 한편 군량미 조달에 힘썼으며,

청나라와의 강화에 반대했으나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였으며,

그해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물러난 뒤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 했습니다.

그뒤 1630년에 가의대부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연산에서 83세의 나이로 죽어, 진잠(鎭岑)에 장사 지냈습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하며,

1688년(숙종 14)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원(文元)이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임리정(臨履亭)의 현판이나 시판등 편액들은 마루방에 있을듯 한데,

문이 굳게 닫혀 있는까닭에 안을 들여다 볼수없어 아쉬움이 남는데,

다른곳의 정자문화 처럼 문이 개방되어 누구나 주인이 되어 탁트인 공간에서,

옛선비들의 정취를 느껴 볼수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닫힌 문들로 아쉬움의 미련이 남습니다.

 

 

 

마루아래에 세개의 돌을 모양에 맞추어 나란이 두어 디딤돌로 해두어 눈에 들어 옵니다.

 

 

 

임리정(臨履亭)의 앞마루에서 앞을 내려다 보면  옛날 황산나루터의 전경이 들어오고,

 

 

 

세월의 흐름으로 금강을 바라보는 풍광도 많이 달라진듯 합니다.

 

 

 

조선 중기 충청도 사족들의 학맥은 대부분 논산 출신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연을 맺고 있었는데,

김장생은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가 강학했던 정회당과 자신이 세운 양성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제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초려 이유태, 탄옹 권시, 장유, 최명길, 신흠, 이경석 등,

실로 그 이름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로 기호 사림에 종속되어 별다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충청도의 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이 김장생의 근거지였던  이곳 논산 이라고 합니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예학(禮學)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론적 배경은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으로 그의 예학론은 양란(兩亂) 이후 혼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정통(正統)에 중점이 두어졌는데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자의 앞면 두칸의 마루방은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둔 모습으로,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넌출문을 들어 놀려 여름의 시원함을 더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임리정(臨履亭)은 창방 위에는 기둥 사이마다 5개의 소로 받침을 두고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지붕의 가구 방식은 앞뒤 평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갖춘 낮은 동자주를 세워서 종량을 받쳤고,

그 위에는 제형대공이 배치된 겹처마집의 구조 입니다.

 

 

 

오른쪽의 온돌방에도 마루방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눈길을 잡고,

 

 

 

2칸의 마루방의 뒤편은 한칸마다 널문을 달아 두었습니다.

 

 

 

죽림서원 뒤에는 이곳 김장생(金長生)의 임리정(臨履亭)과 송시열의 정자인 팔괘정(八卦亭)이 가까이 있어,

스승이 너무 좋아서 그 근처에 정자를 짓고 있었다는 곳으로 사제의 깊은 정이 흐르는 곳으로,

현재 임리정은 강경유림(江景儒林)의 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가장 오랜 기간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호학파(畿湖學派) 종사(宗師)의 존재를 통해 확인 할수 있으며,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 사제간의 깊은 정을 살필수 있는곳으로,

죽림서원(竹林書院)과 팔괘정(八卦亭)이 가까이 있어 함께 찾아볼만한 곳으로,

논산의 정자 문화재 "임리정(臨履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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