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공주를 여행하면서,

1603년에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설치되어,

충청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관청인 공주 충청감영(忠淸監營)을 찾았습니다.

 

공주 충청감영(忠淸監營)으로,

감영(監營)은 각도의 관찰사가 근무를 하던 곳으로,

충청감영은 본래 충주지역에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공주 지역으로 옮겨졌는데,

임진왜란을 통하여 서울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공주 지역이 재인식되었기 때문으로,

공주 지역은 그 지형과 지세가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이 가로막고,

남으로는 계룡산을 비롯하여 시가지 주변을 300m 정도의 고지가 둘러쌓은 천연의 요새지로서,

서울과 호남 지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육로에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청주보다는 공주가 충청도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공주 충청감영 앞에는 한옥마을이 있어서,

"공주한옥마을"과 함께 찾아 보아도 좋을듯 합니다.

 

 

 

감영의 정문으로 내삼문 바깥에 있는 "포정사 문루(布政司 門樓)"로,

명(明)의 포정사를 모방하여  감영의 정문을 포정사 문루라고 하였고 유형문화재 제 93호 지정 되었으며,

포정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문루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진각지붕집으로,

우진각 지붕은 지붕면이 4면으로 경사진 지붕을 말하며 1층의 양 옆은 판자벽으로 막고 가운데 3칸만 문을 만들어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교동에 있던 것을 1993년 이곳에 이전 복원 하였습니다.

 

 

 

2층은 누마루로 난간을 돌리고 서쪽에 오르내리는 계단을 만들었는데,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막아두어 올라 볼수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포정사 및 삼문은 한때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변형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관아건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포정사 문루 앞에있는 안내문의 배치도를 살펴 보면,

감영에는 단 3채의 건물만 볼수있는데 원래는 49동으로 481칸에 이르렀다고 하며,

충청감영은 임진왜란 전에는 충주에 있었으나 임란중 공주로 옮겼는데,

충청감영은 공주 지역의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1603년(선조 36)에 공주 지역에 설치되어,

1932년 대전 지역으로 충청남도 도청이 이전될 때까지 공주에 있었으며,

현존하는 많은 조선 후기의 문서들로 조선시대 충청감영으로의 공주 지역의 모습을 남겼는데,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이 강제로 합병되면서 충청감영은 훼손되고 소실되면서 거의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금남루 사진, 충청남도 도청과 관련한 사진, 신사 관련 사진, 공주여자고등학교,

관련 사진 등이 남아있어 전하고 있습니다.

 

 

 

포정사 문루의 삼문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동헌(東軒)이 보이고 정면으로 선화당(宣化堂)이 자리해 있습니다.

 

 

 

조선시대 지방 관서에서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 건물인 동헌(東軒)으로,

 

 

 

동헌(東軒)은 관찰사, 병사, 수사(水使), 수령(守令)들의 정청(政廳)으로서,

일반적으로 지방의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하여 졌던 지방관서의 중심이 되는곳 입니다.

 

 

 

동헌(東軒)의 현판이며,

 

 

 

동헌의 주춧돌로 예전의 것을 가져와 사용했는지,

복원 하면서 새로이 다듬어 놓았는지 알수 없지만 사찰의 석조물의 석재로 보여 지기도 합니다.

 

 

 

이곳 동헌(東軒)은 공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곳인데,

참고로 조선시대 충청감영은 원래 충주에 있었는데 공주로 이전을 하게되어,

공주에서는 관찰사가 목사의 역활을 하기도 했었는데,

목이라는 것이 감영의 아래 기관이다보니 안쪽에 있는 선화당 보다는 규모가 작은편 입니다.

 

 

 

유형문화재 제 92호로 지정된 감영(監營)의 중심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이며,

 

 

 

선화당앞 한쪽옆에는 측우기가 있어,

1837년 제작되어 충청감영에서 사용하던것으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는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측우기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된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로 진본은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으며 ,

우리나라에서 처음 측우기가 만들어진 것은 조선 세종대이며,

세종 때 측우기가 만들어진 이래로 여러 차례 측우기가 제작되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측우기는 이것이 유일합니다.

측우기는 상·중·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중·하단의 길이는 각각 10.6㎝, 10.5㎝, 10.3㎝이며 세 단을 분해할 수 있고,

사용할 때에는 꼭 맞게 조정하여 쓰게 되어 있는데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1910년 당시 충청남도 공주(公州)의 감영(監營) 앞뜰에 있었으나  뒤에 일본 기상청으로 옮겨졌다가 1971년 3월 우리나라에 반환되었으며,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라는 명칭은 그것이 원래 공주감영에 있었던 데서 비롯한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宣化堂)으로, 

도내의 일반 행정·군사·조세 및 중요한 재판이 이곳에서 행하던 곳으로,

원래 태조 4년(1395)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에 공주로 옮겨와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선화당 건물은 순조 33년(1833)에 지은 것으로,

선화당(宣化堂)은 공주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19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으며,

원래는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웅장한 건물였으나 옮기면서 축소되어 정면 8칸, 측면 4칸의 24칸 규모로,

조선 중기의 수법이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축으로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화당(宣化堂)의 현판으로,

"임금의 덕을 드러내며 널리 펼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 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내부는 칸을 막지 않고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넓은 공간을 마련하였고 2열로 기둥을 세웠으며,

중앙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주위의 퇴간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으로 꾸몄다고 하는데,

안을 들여다 볼수없게 막아두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조선시대 충청감영이라 하면 충청도 내 총 54개의 고을을 관할하였으며,

오늘날 대전 지역과 충청남도와 충청북도까지 아우르는 광역의 도청였는데,

공주의 충청감영은 복원되는 과정에서 그 규모도 많이 축소된 것 같으며,

공주한옥마을을 돌아보고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인지 존재감도 미미해,

우리에게 보여지는 충청감영은 왠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며,

또한 문루(門樓)나 동헌(東軒), 선화당(宣化堂)까지 바깥에서 건물만 구경하고 내부는 들여다 볼수없게 해두어,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게 되었던 공주의 문화재 "충청감영(忠淸監營)"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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