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한,

겸재(謙齋) 정선(鄭敾)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강서구 가양동에 자리한 겸재정선 미술관은 3층 규모의 전시관으로,

겸재(謙齋) 정선(鄭敾)은 중국 화풍을 깨고 우리 식 그림을 그린 조선후기의 화가로,

신윤복(申潤福,1758 ~1814), 김홍도(金弘道,1745년∼?)와 함께 우리에게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겸재정선 미술관의 3층으로도 입장이 가능하게 되어 있어 3층에서 입장을 합니다.

 

 

 

입구에서 관람안내 표지를 살펴보고,

 

 

 

미술관의 3층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자동판매기에서 입장권을 발매 합니다.

 

 

 

3층의 매표소를 들어서면 초가집의 마루에서 부채를 들고있는 선비의 모형을 만날수 있어,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독서여가(讀書餘暇)"를 재현해 두었는데,

 

 

 

사인풍속화인 "독서여가(讀書餘暇)"로 선비가 툇마루에 앉아 마당의 화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정선의 매우 드문 사인풍속화 중의 하나로 사인풍속화는 사대부들의 여가 생활과 교류를 소재로 한 풍속화이며,

이 작품은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선비가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부채를 펼쳐 들고 마당에 있는 화분의 꽃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안의 책장에는 서책이 쌓여 있고, 책장 문에는 겸재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어 이 곳이 겸재의 서재임을 알 수 있고,

쥐고 있는 부채에 그려진 그림 역시 겸재의 그림이며,

열어젖힌 곁문을 통해 보이는 우람한 향나무의 뒤틀린 굵은 둥치가 보이는데 그 푸른 가지는 초가지붕 앞까지 뻗어 있어,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일반적으로 수묵이나 수묵담채로 그리던 사인풍속화를 과감하게 채색화 풍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정선(鄭敾)은 1676(숙종 2)∼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화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며,

그의 선세(先世)는 전라남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세거한 사대부 집안으로 뒤에 경기도 광주로 옮기고,

고조부 연(演) 때 서울 서쪽〔西郊〕으로 다시 옮겨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으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위수(衛率: 왕세자를 따라 호위하는 직책)라는 벼슬을 비롯하여,

1729년에 한성부주부, 1734년청하현감을 지냈고 자연·하양의 현감을 거쳐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낭청(訓練都監郎廳),

1740년 12월부터 1745년 1월까지는 양천의 현령을 지냈으며 그 뒤 약 10년 동안은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754년에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그리고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라는 종2품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남아 있는 30세 전후의 금강산 그림 등을 통하여 젊었을 때 화가로서 활동한 것이 확실 하지만,

40세 이전의 확실한 경력을 입증할 만한 작품이나 생활 기록 자료는 없으며 그의 집안은 원래 사대부 출신으로 신분상의 중인은 아니며,

몇 대에 걸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지 못한 한미한 양반으로,

그의 뛰어난 그림 재주 때문에 관료로 추천을 받았으며 마침내 화단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정선은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겸재파 화법(謙齋派畫法)이라 할수있는 한국 실경 산수화의 흐름을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이어가게 하여,

이들 중에는 강희언(姜熙彦)·김윤겸(金允謙)·최북(崔北)·김응환(金應煥)·김홍도(金弘道)·정수영(鄭遂榮)·김석신(金碩臣) 등을 꼽을 수 있으나,

그의 두 아들인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의 가업을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고 있으며 정선에 관한 기록은 어느 화가보다 많으며 작품 수도 가장 많습니다.

 

 

 

겸재정선 미술관의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있어 계단을 통하여 2층으로 내려가 봅니다.

 

 

 

2층 전시실로 2층에는 금강산을 사랑했던 겸재(謙齋)의 금강산 작품들과,

한양주변을 그린 "한양진경"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품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金剛全圖)"로,

종이에 수묵화로 94.5x130.8cm 크기로 해방 직후 삼성그룹의 이병철 전 회장이 매입하여 현재 삼성미술관 소장품으로,

1734년(영조 10년) 당시 59세였던 겸재 정선이 금강내산(金剛內山)을 부감형식(俯瞰形式)의 원형구도로 그린 것으로,

"인왕제색도(金剛全圖)"와 함께 겸재 정선의 대표작으로 전체적으로 원형구도를 이루고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모습으로,

눈덮인 봉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긋는 수직준법을 이용하여 거칠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와 함께 위쪽에는 비로봉이 우뚝 솟아 있고 화면 중심으로는 만폭동 계곡이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바위로 이루어진 메마른 느낌의 봉우리들과는 대조적으로 왼편에는 무성한 숲을 이룬 부드러운 토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붓을 옆으로 눕혀 점을 찍는 방식으로 나타내었고 화면의 윗부분에는 그림의 제목과 함께 작가의 호, 그림에 대한 감상 등이 적혀 있습니다.

당시의 산수화는 주로 중국 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인데 반해 이 그림은 직접 우리나라의 실경를 보고 그린 것으로,

정선이 그린 금강산그림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고, 그의 진경산수화풍이 잘 드러난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외, 금강산의 진경을 그린 겸재(謙齋)의 작품들로 그중 몇점을 살펴보면..

 

 

 

겸재정선화첩 중에서 금강산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1747년 작<해악전신첩>의 ’금강내산도’와 상당히 흡사해 말년 작품으로 추정되며,

화첩은 종이로 표지를 하고 그림은 비단에 그렸으며 한 면의 크기는 세로 38 가로 28.1cm의 크기로, 

겸재 말년의 원숙한 화풍을 유감 없이 보여주는 금강산 그림으로,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 대원장이 한국에 왔다가 수집해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며,

2005년 독일에서 돌아온 <겸재 정선 화첩>은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돌아 왔습니다.

 

 

 

2층 전시실에는 금강산과 관련한 설명과 겸재 정선의 작품들이 소개가 되어 있어 좀더 살펴보면,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으로,

겸재의 작품으로 전하는 같은 제목의 <단발령 망금강>은 두 폭인데,

겸재가 72세에 금강산을 다시 찾아 같은 구도로 다시 그린 것으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해악전신첩>에 실려 있습니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백미이자 겸재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한때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었는데,

1933년 장형수라는 골동거간이 친일인사 송병준의 손자인 송재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고, 

측간에 가려다 군불을 때고 있던 머슴이 아궁이 속에 이 <해악전신첩>을 넣으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림을 빼앗아 송재구에게 들고가 헐값에 산뒤 간송 전형필에게 넘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권섭(權燮.1671-1759)이 소장했던 화첩인 '공회첩'(孔懷帖)에 들어 있었다는 "옹천(甕遷)"으로,

옹천은 강원도 고성에에서 통천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절벽으로 독(甕)처럼 생긴 가파른 낭떠러지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그 빼어난 경관으로 인해 이를 소재로 한 조선시대 회화는 몇 작품이 전하고 있는데,

옹천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을 짙은 먹의 굵은 필획으로 거침없이 그려냄으로써 험준한 형세가 더욱 힘을 받는 듯하며,

반구 또한 수직의 고저감을 강조하여 내려 그은 필치가 언뜻 단조로운 듯하나,

실경과 마주하여 정선이 느낀 인상과 심상(心象)의 이미지가 제대로 투영되었다고 하는 작품입니다.

 

 

 

겸재가 63세에 그린 작품 "시중대(侍中臺)"로,

이곳은 현재 북한지역으로 강원도 영동의 맨북쪽 고을로 시중호(侍中湖)에는 7개의 섬이 있고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여,

경포대와 다툴정도로 빼어난 곳이라 하며,

정선은 금강산의 명소들 신령스런  모습을  표현하려고 대조적 대비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그는 스스로  이런구도를  좋아 하였다고 하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입니다.

 

재미있으면서 아름다운 그림 "백천교(白川橋)"로, 

금강산 유점사 아래에 있는 계곡에서 피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맑은물이 흐르는 계곡에 위치한 편편한 바위 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고, 서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두사람과,

금강산까지 타고온 말들이며 하인들이 말들을 관리하고 있는 모습이 있으며  말을 타고 갈 수 없는 곳은 가마를 타고 왔는데,

당시 유점사, 장안사에 계시던 스님들이 가마꾼으로 차출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교사상를 중시하면서 불교를 억압했기 때문에,

당시 스님들은 양반들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합니다

1711년 작품으로 비단에 옅은 채색의 36.0×37.4cm의 크기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입니다.

 

 

 

한쪽에는 겸재 정선 당시의 한양 주변의 모습을 모형으로 해두어,

 

 

 

선택을 하면 겸재 정선의 작품과 설명을 들을수 있습니다.

 

 

 

또한 전시실 한쪽에는 진경산수화, 탁본등을 체험해 볼수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서,

 

 

 

선생님들의 지도로 체험해볼수 있으며,

 

 

 

가족과의 나들이에 작품감상과 함께 체험을 통한 좋은 추억도 남길수 있습니다.

 

 

 

1층 전시실로 내려가 봅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는 겸재 정선의 화법과 작품을 알기쉽게 설명을 해두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외침을 겪은 조선은 전쟁의 상흔을 씻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 시기를 "진경(眞景)시대"라 하며 진경 문화의 선봉에 있었던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1층에는 양천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 위주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어,

 

 

 

양천현아(陽川縣衙)의 옛모습으로,

영조 16년(1740) 겸재 정선의 보임할 당시의 양천현아를 옮겨놓은 모형도 입니다.

 

 

 

양천 현아 근처에 있던 소악루와 달뜨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소악후월(小岳候月)"로,

겸재가 사천 이병언의 시를 감상한 후 소악루 일대를 그린 그림입니다.

65세에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정선은 5년간 이곳에 올라 그곳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담았는데,

강건너 달아래에 절두산이 있고 양화나루 근처를 그린 작품으로 부드럽지만 개성적인 필치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巴陵明月出    파릉(巴陵:양천)에 밝은 달 뜨면

先照此欄頭    이 난간 머리에 먼저 비친다.

杜甫無題句    두보(杜甫) 시에 제구가 없는 것은

終爲小岳樓    끝내 소악루 뿐이겠구나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2㎝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종해청조(宗海廳潮)"로,

양천현은 (지금의 강서구) 동헌을 종해헌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한강 하류에 위치해 있어 서해 바다에서 만조시 이곳까지 파도가 밀려와 조석간만(潮汐干滿·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하여,

물소리가 새소리처럼 맑고 아름답게 들린다 하여 "종해청조" 이므로 종해헌 또는 동헌으로 고을 원님이 근무하는 집무실을 말하며,

양천현 현령이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한강의 하류를 바라다보며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밀려오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림에서 보면 어선들이 정박해있는 포구는 고고마진 이라는 나룻터로 지금의 마곡동 이며,

1892년 을축년에 한강에 대홍수가 발생해서 안양천이 범람하고 영등포 당산동 양평동 일대가 완전히 침수된 이후로 양천 뚝방을 쌓으면서,

지금은 서남 하수종말 처리장이 되어 육지가 되어있습니다.

우측으로 멀리 보이는 산은 동작진이며 근거리에 보이는 산은 작은쥐를 닮았다는 소엄쥐산(인공폭포)이고,

좌측 멀리 보이는 산은 한양의 안산인 목멱산(남산)입니다.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현령으로 부임할 당시 양천현 관아의 모습인 "양천현아(陽川縣衙)"로,

양천읍지에 "동헌 종해헌(宗海軒)이 건좌손향(乾坐巽向:서북쪽에 앉아서 동남쪽을 바라봄)"이라고 기록돼 있어,

현아 전체의 좌향(坐向:건물 앉은 방향)이 동남향이었을 것으보 보이는데,

겸재는 이를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서북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틀어 놓아,

방향 감각까지 배려한 빈틈없는 사생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740년 비단에 엷게 채색한 29.1×26.9㎝ 크기의 작품으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입니다.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기는 모습의 조어도(釣漁圖)로,

옛선비들은 조어(釣漁)의 의미를 빌려 때를 만나면 큰뜻을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즐겨 그렸던 그림으로,

21.1×27.7cm의 크기로 겸재정선기념관 소장품 입니다.

 

 

 

겸재 정선이 영조 16년에 그린 29.0×23.0㎝ 크기의 "설평기려(雪坪騎驢)"로,

비단에 먹과 엷은 색으로 칠하였으며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겸재의 벗인 사천 이병연이 동지 이틀 전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직전에 이 그림이 그려졌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는 뜻으로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그해 겨울에 그린 그림으로,

겨울 어느날 새벽에 일어나(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인 인시(寅時)에 일어나,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인 술시(戌時)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온 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어,

갓과 눈옷을 차려입고 나귀에 올라 아무도 몰래 동헌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길을 나섰던것으로 보여지는데,

앞의 고목 밑을 지나니 양천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끝에 우장산(雨裝山) 두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며,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눈 경치는 대상의 윤곽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라,

우장산 두 봉우리도 실제 이상으로 윤곽이 분명 하게 표현 해두었는데,

사천 이병연은 이 그림에 제화시를 붙여 놓았습니다.

長了峻雙峰    길구나 높은 두 봉우리            漫漫十里渚     아득한 십리 벌판일세.

祗應曉雪深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不識梅花處     매화 핀 곳 알지 못하네

 

 

 

"안현석봉(鞍峴夕烽)"으로,

안현은 안산(鞍山) 또는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르는 서울의 서쪽 산으로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 및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높이 296m의 산이며,

한양의 내백호(內白虎·명당의 서쪽을 막아주는 안쪽 산줄기)인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다시 갈라져 인왕산 서쪽을 겹으로 막아주고 있으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합니다.

이 산을 안산 또는 안현이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안장같이 생겼기 때문이며,

한강의 너른 강폭과 함께 대담하게 그려내어 강과 산이 어우러지도록 했는데 돛단배 몇 척을 띄워도 드넓은 강물이 채워지지 않았던지,

광주바위와 허가바위를 끌어내어 음양의 조화를 통해 화면 구성을 완성시켰는데,

사진기로는 잡히지 않는 구도로 시각의 한계를 초월한 이런 화면구성이 바로 겸재의 화성(畵聖)다운 면모 이기도 합니다.

1740년 비단에 채색한 23.0×29.4㎝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 입니다.

 

 

 

3층으로 다시 올라와 미술관을 나와  앞에 꾸며둔 작은 공원으로 향합니다.

 

 

 

미술관 뒤뜰의 공원은 작지만 아담하게 꾸며놓았고

 

 

 

공원의 한쪽에는 커다란 붓의 조형물을 세워두어 겸재정선의 미술관임을 상징하듯 합니다.

 

 

 

진경 문화의 선봉에 있었던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예술혼을 살펴볼수 있으며,

조선 후기 화풍을 살펴볼수 있으며 정선이 직접 답사하며 화폭에 담은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감상할수 있으며,

양천현아의 옛모습과 진경산수화 체험을 해볼수있어 가족 나들이에도 좋은곳으로 서울 강서구의 "겸재정선미술관" 입니다.


- 겸재정선 미술관의 기본 안내 입니다.

위치:서울시 강서구 양천로 47길 36

요금: 성인 1000원, 청소년 500원, 7세 이하 무료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 추석 당일

이용 시간: 3~10월 10:00~18:00, 11~2월, 토 ・ 일요일과 공휴일 10:00~17:00,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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