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역사마을로,

경북 양동 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북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에서  "하회 빈연정사(河回 賓淵精舍)"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것 처럼 하회(河回)마을은,

2010년 경북 양동 마을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으로,

풍산 류씨(柳氏)의 집성촌으로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으로 유명 합니다.

 

 

 

하회(河回)마을은 "산태극 물태극(山太極 水太極)"으로 산과 물이 태극 모양 또는"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으로,

"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 이라 부르며 풍수지리학적으로 길지라고 널리 알려진 곳으로,

둥그런 형태로 마을이 조성되어 있어 꼼꼼하게 체크하면서 돌아 보아야 합니다.

 

 

 

빈연정사(賓淵精舍)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서,

만송정과 부용대(芙蓉臺)을 바라보이는곳에 자리잡은 정사로 국가민속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사(精舍)의 일각문(一角門)인 "완송문"에 들어서면,

앞쪽과 우측에 마당을 두고 좌측 모서리에 하회 빈연정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왼쪽 1칸에는 앞뒤 2칸통 온돌방을 앉히고 그 우측 2칸은 모두 4칸통 대청으로 꾸몄으며,

온돌방 앞쪽 기단에 아궁이를 시설하고 뒤쪽 기단에 굴뚝을 내었습니다.

 

 

 

빈연정사는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 1583년(선조 16)에 건립하여 서재로 사용하던 정사이며,

류운룡은 15세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에 힘썼으며,

이황이 향리인 도산에 서당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황 또한 류운룡의 학문적 재질과 성실한 자질에 감복하여 총애하였다 합니다.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을 최근 시멘트로 마무리하고,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는데 대청 정면 중앙기둥만은 두리기둥입니다.

 

 

 

대청 전면은 개방하고 우측면과 배면은 판벽(板壁)에 쌍여닫이 널문을 달았고,

우측면에는 머름을 들인 높은 울거미널문을 설치하고 배면에는 머름 없는 낮은 띠장널문을 내어 두 면을 달리한 것이 특이합니다.

 

 

 

빈연정사(賓淵精舍)의 주인 류운룡(柳雲龍)은 조선중기 안동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며 류성룡(柳成龍)의 친형 입니다.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은 어릴 때부터 총명해 모든 경사(經史)를 통독함으로써 사문의 촉망을 받았으며,

1572년(선조 5)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전함사별좌가 된 뒤 이듬해 의금부도사로 추배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다시 사포서별제가 되었고,

금부예천과 풍저창직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주부로 승진한 뒤 진보현감 등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병을 이유로 사퇴 하였고 다시 인동현감으로 추배 되었다가,

자리를 옮겨 광흥창주부와 한성부판관, 평시서령, 사복시첨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류성룡이 선조에게 그를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한 건의가 받아들여져,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류운룡의 효심을 칭찬 하였습니다.

1592년 가을에 풍기가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인데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에게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598년(선조 31) 봄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와 태백산(太白山) 아래 도심촌(道心村)에 우거하였고,

12월 동생 류성룡과 함께 도심우사(道心寓舍)에 우거하였습니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 도산(陶山)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농운정사(?雲精舍)에 머물면서 『사기(史記)』를 배웠고,

1562년 류성룡과 함께 이황을 배알하였고 계상서재(溪上書齋)에서 몇 달간 머물면서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으며,

1566년 이황에게 상서하여 정주(定州)에서 중간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수정 및 증주목록(增註目錄)의 일을 여쭈었습니다.

학문에서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겸암집(謙菴集)』이 전하며, 「기사문상장시사(記師門喪葬時事)」를 지었습니다.

1601년 사망하였고 1605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고 사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안동의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배향 되었고 1834년 7월 문경(文敬)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길재(吉再)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祠宇)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한 덕으로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온돌방과 대청 사이의 2칸에는 벽체 없이 모두 이분합 들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빈연정사(賓淵精舍)의 현판으로,

조선후기의 문신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는 정사(精舍)의 마루위로 보이는 우물천정이며,

 

 

 

마루에서 내려와 정사(精舍)의 주변을 돌아봅니다.

막돌로 허튼층쌓기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대청 정면 가운데 기둥 하나만 원주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방주를 세워 보아지를 끼운 굴도리 장혀수장집으로 대청 정면과 배면의 가운데 기둥 상부의 보아지는 특별히 초각으로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온돌방보다는 대청이, 좌우보다는 중앙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는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 입니다.

 

 

 

정사(精舍)의 아궁이에는 근자에도 온돌방에 불을  넣었던 흔적이 보이고..

 

 

 

정사(精舍)의 정면에는 쌍여닫이 띠살이 달려 있고,

배면과 좌측 뒤쪽에는 외여닫이 띠살 창호가 달려 있으며 좌측 앞쪽 아랫목 부분에는 열 손실을 고려한 듯 조그마한 외짝 들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정사(精舍)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경으로,

하회마을 북촌의 화천(花川)과 부용대(芙蓉臺)를 바라볼 수 있도록 북향으로 자리잡아,

부용대와 그아래의 만송정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만송정은 마을앞 소나무숲으로 만그루라는 뜻이아니고 많다는 뜻이며

겨울 북서풍을 막아주고 마을에서 부용대의 절벽이 바로보이는것을 차단하기 위한 풍수적인 비보림이라 하며,

빈연정사(賓淵精舍)는 경치와 조경이 뛰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넉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회마을 북쪽의 풍광 좋은곳에 자리잡아,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정한 모습의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의 한 채짜리 별서로,

다도체험과 더불어 예절교육을 하고있는 곳으로,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하회 빈연정사(河回 賓淵精舍)"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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