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최초의 왕릉으로,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찾으면서,

정릉(貞陵)과 청계천의 다리 광통교(廣通橋)에 얽힌 사연이 있다하여,

종로네거리에서 을지로네거리 방향으로 나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의 청계천 위에 놓여있던 다리 "광통교(廣通橋)"를 찾았습니다.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광통교(廣通橋)로,

 

 

 

서울 도심의 휴식처로 자리잡은 청계천은,

많은이들이 즐겨찾는 곳이지만 정작 광통교(廣通橋)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이는 그리많지 않습니다.

 

 

 

"넓게 통하는 다리" 라는 의미의 "광통교(廣通橋)"는,

대광교(大廣橋), 대광통교(大廣通橋) 북창다리, 큰광교, 큰광통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청계천에서 가장 중요한 다리로서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렀고,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원래는 광통방(廣通坊)에 있는 큰 다리라는 뜻의 대광통교(大廣通橋) 입니다.

 

 

 

광통교(廣通橋)에 얽힌 이야기를 간단하게 써둔 안내문이 있어,

광통교(廣通橋)는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는데,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흙으로 다리를 놓았으며, 1410년 (태종 10년) 큰 비로 백성들이 빠져죽는 일이 벌어졌고..

다리가 유실되어 의정부에서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그래서 석교(石橋) 광통교가 세워졌습니다.

최근 청계천을 복원해 조선 최초의 병풍석(屛風石: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는 12방위의 돌)과 영저 영탁(靈杵 靈鐸) 조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리 아래 음지에 가려져 있어서인지 아니면 태조가 자신의 수릉 조영에 최고의 돌만 골라 쓴 덕분인지,

이보다 12년 후에 조영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의 조각물과 비교해도 훨씬 잘 보존돼 있고 형상도 선명합니다.

600년을 훨씬 넘긴 이 조각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조각들보다 100년 이상 앞선 작품들로 당대 장인들의 손길이 남아있는 명품입니다.

 

 

 

광통교(廣通橋)의 역사를 살펴보면,

태종 이방원은 계모인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만들었고,

그후 1760년 경진준천(庚辰濬川)을 한 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 하였습니다.

이후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되었고,

1910년 8월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 있던 전차선로를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어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됨에 따라,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1923년 청계천 암거공사 때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아 하수를 배출하였고,

1958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히게 되었습니다.

2003년 7월 시작된 청계천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시대의 대광통교가 있던 자리에 광교가 새롭게 놓였는데,

교통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쯤의 위치에 복원 되었습니다.

다리의 원형복원을 위하여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부분과 창덕궁 및 탑골공원에 흩어져 있던 부분을 찾아내 활용하여,

조선기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사람만 건너 다닐수 있습니다.

 

 

 

광통교(廣通橋) 기둥과 상판 화강석의 널다리 형태의 석교로,

다리 상판을 화강석으로 만든 보가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상판의 돌틈사이로 빛이 보입니다.

 

 

 

광통교(廣通橋)를 살펴보면,

다리에 쓰인 석재들이 제것이 아닌듯 보이는것들이 여럿 보이는데,

 

 

 

교각(橋脚)과 상판사이에서 지탱을 해주는 보와 같은 역활을 하는 석재중 일부는 문양과 구멍등으로 다른용도로 사용했던 석재임을 알수있어,

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할 신장석(神將石)이 육백여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으로 우리에게 광통교(廣通橋)의 일부로 보여지고 있는데,

 

 

 

광통교(廣通橋)의 양면 벽하부 쪽에는 정교하고 화려한 솜씨의 조각품을 볼수있어,

정릉(貞陵)의 병풍석(屛風石)중 한면을 담당했던 부분이며,

 

 

정릉(貞陵)의 병풍석(屛風石)은 신덕왕후를 모욕하기 위해 거꾸로 놓아둔 모습이 보이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신덕왕후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애정의 표현인듯,

병풍석(屛風石)의 조각은 조선왕릉의 어느곳에 비해서도 뛰어남을 느낄수 있으며,

 

 

 

병풍석(屛風石)의 일부는 바로 놓여져 있기도 하여,

광통교(廣通橋)는 태조 때 토교(土橋)로 축조하였던 것인데,

1410년(태종 10)에 홍수로 파괴되자 다시 석교(石橋)로 개축 하였고,

다리 건설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태조 이성계 사후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의 묘인 정릉의 천장(遷葬)으로 봉토하려던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을 뽑아 이용하였는데,

이 때 사용된 구정릉의 석물은 태조 5년(1396) 강비의 서거와 함께 태조가 애도 추념하는 충심에서,

특별히 제주목사(濟州牧使) 여의손(呂義孫)으로 하여금 일류 석공들을 감독하여 제조하였던 것이라 그 정교한 솜씨를 짐작할 수 있으며,

다리 남북 양측의 석벽을 이룬 12개의 신장석(神將石)은 길이 8척, 넓이 3척 4촌의 석면(石面)에,

총운(叢雲) · 당초(唐草) 모양 가운데에 보관(寶官)을 쓰고 양수(兩袖)를 합장한 신장(神將)을 부조한 것이 지금도 완연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은 600년전 당대 최고의 석공의 작품임을 알수있으며,

 

 

 

뒤집어 거꾸로 놓아둔 병풍석(屛風石)과..

 

 

 

옆으로 뉘여둔 모서리 병풍석(屛風石)의 모습도 볼수있습니다.

 

 

 

모서리 병풍석(屛風石) 또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 입니다.

 

 

 

광통교(廣通橋)아래에는 두줄의 교각(橋脚)이 나란이 서있어,

물의 흐름에 저항을 최소화 하기위해 마름모 꼴로 각을 세워 놓았으며,

 

 

교각(橋脚) 기둥에는 글씨가 암각되어 있슴을 볼수있어,

 

 

 

"경진지평(庚辰地平)"으로,

1760년(영조36년)에 개천의 범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조는 큰 힘을 쏟아 개천의 바닥을 파내고 다리들을 보수하였으며,

준설 작업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글씨를 다리 기둥에 새겼으며,

후일 이글자가 메워져 가려지게되면 다시 준설하라는 의미의 글이기도 합니다.

 

 

 

"계사경준(癸巳更濬)"으로,

계사년(1773년)인 영조49년에 준설을 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며,

실제로 영조는 청계천 준설 작업 당시 광통교에 행차하여 석축을 살펴 보았다고 합니다.

 

 

 

기사대준(己巳大濬)입니다.

1809년(고종 6년)에 다시 준설했기 때문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광통교 교각에 남겨진 준천(濬川)기록 말고도 준천은 영조 이후에도 자주 시행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고,

순조 18년, 순조 33년, 헌종 8년, 철종 3년 등 있었고 고종 때도 기사년 외에도 몇 차례 준천을 한 기록이 남이 있습니다.

 

 

 

광통교(廣通橋) 아래에서 교각위를 살펴 봅니다.

 

 

 

다리 아래에서 보이는 광통교(廣通橋)의 난간석에도,

난간의 기둥석도 통일되지 못하고 서로 다른 모습을 볼수 있어서..

 

 

 

광통교(廣通橋)의 상부 난간석도 정릉(貞陵)의 병풍석(屛風石)임을 알수 있는데,

 

 

 

광통교(廣通橋)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양에서는 광통교가 가장 붐비는 곳었다고 전하는데,

 

 

 

이방원이 실권을 잡아 왕위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던,

방원(芳遠)의 난으로도 불리는 "1차왕자의 난"을 계기로,

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았고 자신의 능마저 한쪽으로 내쳐지는 비운을 맞았던,

조선 최초의 왕비인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몰락의 아픔을 새겨볼수 있는곳 이기도 합니다.

 

 

 

신덕왕후의 능침의 석물들을 통해,

조선초기의 석물들과 권력다툼의 결과를 살필수 있으며,

다리에 사용된 정릉(貞陵)의 신장석(神將石)과 우석( 隅石)등에 새겨진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등으로,

600년전 조선초기의 화려한 조각을 찾아볼수 있는곳으로 청계천의 다리 "광통교(廣通橋)"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