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를 여행하면서,

조선조 단종(端宗)과 관련된 유적지인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을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위치하고 있는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으로,

사적 제491호로 지정 되어있는 유적지 이지만,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은 소수서원 (紹修書院)과 선비촌 인근에 있지만 찾는이는 많지 않습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주사(廚舍)가 자리해 있어,

관리인이 기거하는듯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볼수없어 담장너머로 들여다보면,

 

 

주사(廚舍)는 동향한 정면 4칸, 측면 2칸반 규모의 "ㄷ"자형 건물이고,

일각문을 낸 동쪽담 양 끝은 ㄷ자로 꺾어 건물과 접속하여 내밀한 마당을 형성하고 있으며,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 익사(翼舍)에 1칸과 칸반 온돌방을 내달았고, 우측 익사 칸반 온돌방 앞에 1칸 부엌을 두었습니다.

 

 

 

사주문의 오른쪽에는 제청(祭廳)인 제실(齊室)이 있어,

제청(祭廳) 은 정면 4칸반, 측면 4칸 규모의 ㄱ자형 집으로 건물의 양쪽 끝에 ㄴ자로 담장을 설치하여 네모진 안뜰을 이루고,

서쪽담에 일각문을 내었으며 평면은 서향한 3칸 우단에 칸반 온돌방을 두었고 대청 좌단 칸 앞쪽에 남향으로 2통간과 1칸 온돌방을 배치하고,

그 앞에 긴 쪽마루를 설치 하였으며  제청(祭廳)과 주사(廚舍)는1980년에 건립 하였습니다.

 

 

 

제청(祭廳)의 마루 위에는 많은 편액들을 볼수 있으며,

 

 

 

1칸의 온돌방에는 제실(齊室)의 작은 현판도 보입니다.

 

 

 

그리 크지않은 제실(齊室) 이지만, 의외로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크고 작은 시판들과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의 내력을 알려주는 편액들 입니다.

 

 

 

마주하고 있는 제청(祭廳)과 주사(廚舍)를 지나면,

토석담장을 두른 일각문(一角門)이 자리해 있고,

 

 

 

담장 아래에는 요즘 보기힘든 하얀 민들래가 있어 눈길을 잡는데,

흔이 보이는 외래종인 노란민들래와 달리 공해에 약한 하얀 민들래여서 요즘은 귀하게 볼수있는 꽃이기도 합니다.

 

 

 

일각문(一角門)에는 금성단(錦城壇)이라는 작은 현판이 있으며,

글씨를 왼쪽부터 읽게 되어있어 특이 합니다.

 

 

 

일각문(一角門)을 들어서면 토석담장 안에 단소 영역이 동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15세기 중엽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사육신 등의 단종(端宗)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이곳 순흥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이 고장 인사들과 함께,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 복위를 재차 꾀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순흥은 폐읍이 되어 풍기·영주·봉화 3읍에 분속 되었다가,

그 후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고 순절자가 신원되는 한편 순흥도 복읍되었으며,

1719년(숙종 45)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왕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단을 설치하였고,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의 청원에 따라 단소(壇所)를 정비하였으며,

그 후 1980년경에 제청과 주사를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단소는 전면의 금성단문을 들어서면 "品"자 모양으로 3개의 단을 설치하여,

윗단에 금성대군, 왼쪽 단에 이보흠, 오른쪽 단에 순절의사의 단(壇)을 배치 하였는데,

조선 세조 때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며,

수양대군의 넷째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및 그 일에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 좌측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로,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고,

높이 140㎝, 폭 55㎝, 두께 24㎝의 크기로 순의비를 세웠습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단소로,

"순흥읍지"에 따르면 금성대군신단을 처음 조성한 사람은 홍천군 현감 이대근으로 비밀리에 단을 설치 하였다고 하며,

조선 세조 원년(1455) 단종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 일파는,

금성대군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워 삭령(朔寧)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移配)시켰다가,

이듬 해 성삼문 (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이 상왕 복위운동에 실패하여 참혹하게 희생되자 그 일에 연루되었다 하여,

금성 대군은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금성 대군은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복위를 위한 격문을 짓게 하여 은밀히 순흥고을로 모여들게 하였으며,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년(1457)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 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 (廢府)되고 말았습니다.

 

 

 

왼쪽에는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에 앞섰던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소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함께 처형당한 지역 선비들을 추모하기 위한 단소이며,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이 복직되자 1693년(숙종 19)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유배되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壇)을 쌓았다고 하며,

이후 1719년(숙종 45)에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상소하여 3개의 단으로 고쳤고,

1742년(영조 18)에는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단소(壇所)를 정비하였으며,

1980년에는 신단 앞에 제청(祭廳)과 주사(廚舍)를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은 단종(端宗)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 국왕에 대한 충의가 강조되고 탕평정치가 활성화되는 역사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

당시 인신(人神)을 위해 설치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고 제단도 잘 보존되어 있어서,

조선 후기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적으로 평가 되지만,

유명 유적지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인근에 있슴에도 찾는 이들이 거의없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단종(端宗)과 관련한 또하나의 유적으로,

단종 복위를 재차 꾀하다가 많은 이들의 목숨을 잃었으며, 

순흥부까지 폐부(廢府)를 당하는 역사를 돌아 볼수있는 유적지인,

경북 영주의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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