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에 있는 궁산공원(宮山公園) 일원을 돌아 보면서,

궁산(宮山)근린공원 초입에 있는 양천향교(陽川鄕校)를 찾았습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양천 향교(陽川鄕校)로,

조선조 태종 12년(1411)에 창건돼 노후되고 쇠락되었던 것을 1981년에 전면 복원 하였는데,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을 비롯, 명륜당(明倫堂), 전사청(典祀廳), 동재(東齋),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과 부속건물 등 8동이 있으며,

현재 양천향교에서는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습니다.

 

 

 

홍살문의 왼쪽에는 양천향교의 전통 놀이 공간인 유예당(遊藝堂)이 있어,

 

 

 

유예당(遊藝堂)은 현판글씨가 특이한데,

서예가인 하석 박원규님 글씨라 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습니다.

 

 

 

정면2칸 측면한칸의 아담한 규모의 유예당은,

방은 들이지 않고 마루와 마루방만을 둔 구조로 보이는데 관람석을 앞에두고 있어 유예당은 무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향교로 향하면 돌계단 위에는 양천향교(陽川鄕校)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이 있고,

 

 

 

삼문의 왼쪽 담장 아래에는 비림(碑林)이 있어, 

비석은 9기로 양천 고을 사또와 경기도 관찰사의 선정비와 공덕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비석들을 모아 두었다고 합니다.

 

 

 

삼문을 들어서면 통상적인 향교의 배치에 따라 강학공간이 나오며,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 교육기관으로 양천향교(陽川鄕校)는 전국 234개의 향교중 유일하게 서울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본래 김포에 있던 양천향교가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서울에 편입되어 서울에 들어오게 되었고,

조선은 개국후 개성에서 한양 천도 이후 유학을 국시로 정하고 이를 토대로 교육기관을 확장했는데,

성균관과 사학을 중앙 교육기관으로 두고 각 군현에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양천향교는 1411년(태종 11년)에 설립되어 오랜 세월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해 왔고,

이러한 역사와 조상들의 유교 사상, 공부 방법 등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기 좋은 역사유적지로 1981년에 전면 복원했습니다.

6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양천향교 역시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外三門),

외삼문을 지나면 중앙에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 명륜당 뒤로 내삼문,

그 뒤로 대성전, 대성전 옆으로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양천향교의 동재(東齋)가 있고,

 

 

 

왼쪽에는 서재(西齋)가 있어,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서무,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소로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정면에는 돌계단으로 한단 높이하여 강학 공간의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이 있어,

 

 

 

정면 5칸 팔작 지붕의 제법큰 규모로 전면에 쪽마루를 두었으며 가운데에 마루방을 두고 양쪽끝에 온돌을 들인 구조로,

마루와 방의 기둥 윗부분에 측면의 외곽선을 따라서 여러 개의 선을 그어서 표현한 "살미"의 모습을 눈여겨 보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명륜당(明倫堂)의 현판으로,

글씨는 복원당시 성균관장였던 이재서의 글이라 합니다.

 

 

 

문이 닫혀있어 안을 들여다 볼수는 없으나,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접어 열 수 있게 만든 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보아 마루방인듯 하며,

 

 

 

문턱이 높고 두짝문이며 외부쪽의 문이니 넌출문이 아님을 보아 온돌방의 문으로 보입니다.

 

 

 

명륜당(明倫堂)의 앞마루에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들어온 솟을삼문을 내려다 봅니다.

 

 

 

명륜당 뒤편에는 강학에 썻음직한 낮은 책상들의 모습이 보이고..

 

 

 

명륜당 뒤편에는 다시 한단 높은곳에 제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어,

 

 

 

계단을 올라보니 대성전(大成殿)의 솟을 삼문은 문을 굳게 걸어놓아 개방을 하지 않는듯 합니다.

 

 

 

담장 너머로 들여다 보닌 왼쪽에 전사청(典祀廳)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이고,

대성전(大成殿)의 모습도 일부 들어 오는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18현(賢)  총 27위 위패에 배향 한다고 하며,

"5성"은 공자(孔子),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이며,

"송조 4현"은 (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주희(朱熹)이고,

우리나라 18현은 신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안유(안향:安珦), 정몽주( 鄭夢周)이며,

조선의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조헌(趙憲), 김집(金集)으로  대성전에서 1년에 2회 석전대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양천향교를 나와 궁산(宮山)으로 올라 봅니다.

궁산은 군사적 요충지이기에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가 있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재임시 그렸던 소악루(小岳樓)가 있으며,

한강 건너 북쪽에 행주산성(幸州山城)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궁산(宮山)은 해발 74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변이 넓은 평야여서 제법 우뚝 솟아 보이며,

궁산의 정상에 서면 한강 건너편의 행주산성이 바라보이는데 멀리 파주 오두산성과 함께 한강하구를 지키던 중요한 요새지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속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곳에 머물렀다가 한강을 건너가 행주산성의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궁산(宮山)의 정상인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로 사적3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궁산은 성황산(城隍山)이라고 불리는 해발 74m의 성산(城山)에 쌓은 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천현의 진산(鎭山)은 성산인데, 읍치(邑治)의 북쪽에 바로 붙어 있으며,

둘레가 726척으로 돌로 쌓은 옛 성이 있었다"고 하였고 성산은 사방이 평야여서 제법 우뚝 솟아 보이는 요충지입니다.

성곽은 산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산 정상을 돌로 둘러쌓는 방식)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고  성벽은 둘레가 약 330m인데,

북쪽으로 한강에 닿는 부분은 매우 험준하며  산 정상부는 일본군이 훼손한 뒤에도 계속 군용(軍用)시설로 상당히 훼손되었으며,

현재 성벽 일부와 함께 훼손된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궁산(宮山)근린공원은 그리 높지않아 산책삼아 거닐듯 다녀올수 있으며,

입구에 겸제정선 미술관이 있으며 한강의 빼어난 풍광을 조망할수 있는 소악루(小岳樓) 등이 있어,

함께 돌아 볼만한 곳으로 서울 강서구 가양동 궁산(宮山)근린공원의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와 양천향교(陽川鄕校)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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