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성을 다녀오면서,

장성의 정자 문화재 기영정(耆英亭)을 찾았습니다.

 

전남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에 위치한 기영정(耆英亭)으로,

기영정(耆英亭)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된 정자 문화재 입니다.

 

 

 

장성 기영정(耆英亭)은 황룡강 지류인 삼계천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언덕에 자리해 있으며,

삼계천을 건너 왼쪽의 상류쪽에 마주하고 있는 관수정(觀水亭)과 함께 정자의 주인이 동일한데,

정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삼계천이 흐르고 있어 경치가 뛰어 납니다.

 

 

 

기영정(耆英亭)은 전라도 관찰사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547)가 1543년 중종의 어명을 받아 지은 정자로,

국조보감(國朝寶鑑) 제20권에 중종조 36년(1541년) 3월. "우참찬 송흠(宋欽)이 연로함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줄 것을 청하자,

상이 소견하여 술을 하사하였는데 송흠의 이때 나이가 83세였다.

전라감사 송인수(宋麟壽)가 그를 위해 고향에 기영정(耆英亭)을 지어주어 영화롭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왕명으로 지어진 정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의 주인 송흠(宋欽,1459~154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관수정(觀水亭)이며 영광 출신으로,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있다가 연산군의 포학한 정치로 물러난 뒤 후진 교육에 전심 하였다가,

1516년(중종 11)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복직, 저작(著作)·박사·수찬(修撰)·정언(正言)·헌납(獻納)·병조정랑·전라도도사·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으며,

1528년 담양부사, 1531년에 장흥부사를 지내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 뒤에 광주목사·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노모의 봉양 외에는 처자와 노복이 굶주림과 추위를 겨우 면할 뿐, 벼슬이 갈려 돌아오는 날에는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었다 하며,

가는 곳마다 청렴하기로 소문이 나서 상사(賞賜)를 받았고 153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다시 노모를 위해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 갔습니다.

101세를 산 노모로 인해 전후 7회에 걸쳐 효렴(孝廉)으로서 상을 받았고 1538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그 뒤 한성부우윤·이조판서·병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 1534년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이르렀으며,

기묘사화 뒤에는 한때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관수정(觀水亭)이라는 현판을 걸어서 자기의 뜻을 붙였습니다.

수학(數學)에 정통했다고 하며 사후 영광의 수강사(壽岡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입니다.

 

 

 

정자 옆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비석 한기가 있고,

 

 

 

기영정(耆英亭)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바닥은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낮은 외벌대의 돌 기단 위에 큰 덤벙주춧돌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웠고,

 기둥 위에는 각을 죽인 보아지와 주두를 놓고 굵은 대들보를 얹었으며 대들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두어 서까래를 받치고 있습니다.

방이 없는 누정으로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바닥에 마루를 깔아 대청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낮은 평난간을 돌렸으며 대지의 위치가 높기 때문에 누마루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중종 39년 갑진(1544년) 3월22일 (경신)에,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宋麟壽)가 영광군(靈光郡)에 순찰 나가,

판중추(判中樞) 송흠(宋欽)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많은 정자가 그랬듯이 병난과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는데, 

송인수의 10세 손인 송겸수(宋謙洙)가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1856년(철종 7)에 기영정을 중건하고 현판도 직접 썼다고 합니다.

 

 

 

정자의 마루는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고, 

한켠에는 오침(午寢)을 즐기시는분이 계시는듯 목침(木枕)을 볼수 있습니다.

 

 

 

기영정(耆英亭)의 현판으로 위사(韋史) 신창희(申錫禧 1808∼1873)가 쓴 정명 현판이며,

 

 

 

또하나의 현판으로 기영정의 중건자인 송겸수(宋謙洙 1803~?)의 글씨이며,

기영정(耆英亭)의 기(耆)라 함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다(年高德厚)"는 뜻이며,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 하며  영(英)은 풀이나 식물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을 말하고 있어,

기영정은 "나이가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정자의 내부 가구(架構)는 평5량가로 대들보 위에 낮은 부재를 놓고 충량을 통부재로 걸쳐 도리 구실을 하고 있으며,

종량 위에는 다시 종량을 두어 장혀받침 종도리와 판대공을 얹고 있습니다.

 

 

 

기영정(耆英亭)의 마루에서는 단 2개의 편액을 볼수 있는데,

참판 김우급의 한시에 이어서 승지 이희웅의 차운시가 있어 이희웅은 7언 율시의 운,

연 年 천 泉 변 邊 , 선 仙 견 鵑을 따라 시를 짓습니다.

차운 승지 이희웅(李喜熊), 호 기천(杞泉)

昔日今時隔幾年 석일금시격기년  옛날은 지금과 몇 해를 지났는가

繁華遺跡付流泉 번화유적부류천  번화한 유적은 흐르는 물에 붙이어졌네

耆英堂破靑莎畔 기영당파청사반  기영정 무너진 언덕에는 푸른 풀만 무성하고

觀水亭頹碧澗邊 관수정퇴벽간변  관수정 푸른 계곡 변두리도 퇴락하였네.

淸德由來疇作匹 청덕유래주작필  청렴한 덕행은 누구 있어 짝하리오

功名成後願從仙 공명성후원종선  공명을 이룬 뒤 신선되기를 바랐다네.

誰知事業曾如許 수지사업증여허  그 누가 사업이 이 같음 알았으리

惟有深林啼蜀鵑 유유심림제촉견  유독히 깊은 숲에 두견새 울부짖네.

이 한시는 인조 14년, 1636년 늦은 봄에 지어진 것으로 국역 지지당유고>에 나와 있으며

이희웅((李喜熊,1562-1648)은 호는 기천(杞泉)이고 송천 양응정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1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권신 이이첨의 미움을 사서 뜻을 펴 보지 못하다가,

인종 반정 후 1624년 식년 을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등을 지냈습니다.

 

 

 

또하나의 편액인 기영정중건기(耆英亭重建記)로,

1857년 기영정 주인 송흠(宋欽)의 후손 송진휴(宋辰休)가 쓴 중건기문으로 송흠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중종의 명으로 당시 전라관찰사였던 송인수(宋麟壽)의 주도로 축조되고 정자의 이름이 정해졌던 건립 배경에 대한 내용을,

송인수의 글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또한 송흠이 직접쓴 기문의 간략한 내용 또한 인용하여,

정자 건립의 뜻과 당시 상황을 전하고, 병화로 인해 퇴락 되었다가 다시 중건하게 된 배경이 내용으로 담겨 있습니다.

 

 

 

기영정(耆英亭)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황강으로 향하는 삼계천의 아랫쪽 풍경이며,

 

 

 

정자의 정면에는 배롱나무가 여러수 있어,

여름에는 화사한 배롱나무꽃으로 운치를 더할듯 합니다.

 

 

 

개천건너 관수정(觀水亭)이 있는 방향의 전경으로,

"기영정의 옛 터를 지나면서 소감을 쓰다(過 耆英亭 故墟 有感)"라는 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의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聽說相公致仕年 청설상공치사년  듣건대 상공이 벼슬을 물러난 때에

君王賜宴此林泉 군왕사연차임천  중종임금은 이 곳 임천 林泉에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네.

圭菴玉節臨花低 규암옥절임화저  규암 송인수의 옥절은 꽃 아래 이르렀고

高氏蓮?倚水邊 고씨연유의수변   고씨(도사 고운을 말함)는 연꽃 휘장을 물가에 설치했네.

폐허가 된 기영정 옛 터에서 예전에 전라관찰사 규암 송인수가 중종임금의 명을 받고 송흠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것을 생각하는 시이며,

여기에서 고씨는 1543년 9월에 쓴 송흠의 잔치 글 말미에도 적혀 있듯이,

전라 도사 고운(高雲)을 이른듯 하며 도사는 감사의 일을 처리하는 실무책임자 이며  부관 입니다.

 

 

 

송흠(宋欽)은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부임하거나 전임할 때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해 검소하게 행차하여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렸고,

101세까지 산 어머니를 지극히 섬겨 7차례나 효렴(孝廉)으로 상을 받기도 해,

1538년에는 청백리(淸白吏)로 뽑히는 대표적인 공직인으로서의 귀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축한 인물로,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관수정(觀水亭)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면앙(俛仰) 송순(宋純, 1493~1583)과 학포(學圃) 양팽손(梁彭遜, 1488~1545) 등 당대의 걸축한 그의 문하(門下)를 둘 만큼 학덕이 깊었던 인물로,

기영정(耆英亭)은 임금이 지어 줄 만큼의 인물이다는 것으로 송흠(宋欽)을 대변하고 있는듯 합니다.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을 돌아볼수 있는 곳이며,

인근의 관수정(觀水亭)과 함께 찾을만한 곳으로 장성의 정자 문화재 기영정(耆英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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