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榮州)를 여행하면서,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書院)으로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았습니다.

주차장에서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령 300~500년으로 추정되는 적송나무 870여 그루로 이루어 놓은 학자수(學者樹) 송림을 지나게 되어,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관념성이 투영된 숲으로 원생들이 오가며 선비 정신을 깨닫도록 조성된 "선비나무" 입니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이름의 사찰터로,

서원 입구에는 현재까지 보물 제59호로 지정된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榮州 宿水寺址 幢竿支柱)"가 남아 있어,

한 변의 길이가 0.53m와 0.36m이며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59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말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합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연고지인 이곳 풍기 땅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향리에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 졌으며,

 

서원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채용해서 유생들에게 독서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주었으며,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이라고 하였다가,

 

중종 40년(1545년)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을 받아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서책을 사들여 서원 문고를 조성하였으며 주세붕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고을 선비들과 함께 성리학 강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세붕이 처음 소수서원(紹修書院)의 터를 닦은 뒤,

안향의 후손으로 경상감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경상도의 각 고을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원에서 일할 노비와 제수에 필요한 식량, 어염(魚鹽) 등을 확보하고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한 운영 규정을 정하여,

서원의 원장 임명 문제와 원생의 정원수, 제향 절차 등을 상세하게 규정 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백운동 서원이 보유한 전답 30결(9만 평)에 어장과 염분 및 보미(寶米)도 운영하게 되면서 서원은 토대를 굳히게 되었고,

조선 명종 5년(1550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여,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서원에 하사하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과  노비도 내렸습니다.

이것이 소위 사액서원의 시초였으며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는데,

사액된 뒤 입학 정원도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도 정하여,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으며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원 당했습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으며,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따온말 입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왼편에 솟아 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서 영귀봉(靈龜峰)이라고 하며,

영귀봉 주변에는 수령이 수백년 된 적송(赤松)이 있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소나무 숲을 "학자수(學者樹)"라 하였습니다.

 

 

 

영귀봉 능선위의 소혼대(消魂臺)는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작별의 정을 나누던 곳으로,

이곳에는 숙수사의 별대(別臺)로 쓰였던 건물 주초자리가 남아있으며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거나 손님을 배웅하던 장소로,

소혼대(消魂臺)란 중국 남송(南宋)시대 강엄의 "암연소혼자 유별이이의(黯然消魂者 惟別而已矣)"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 시(詩) 「별부(別賦)」에서 따왔습니다.

 

 

 

서원의 정문 앞에는 "성생단(省牲壇)"이 있어,

성생단은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살아있는 가축의 건강이나 크기 등의 적합 여부를 살피고 난 후  소, 돼지 같은 가축을 잡던 제단 터 입니다.

 

 

 

 

서원의 입구옆에 있는 정자 경렴정(景濂亭)으로,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서원 학생들의 토론과 사색처로 이 정자를 세웠으며,

정자 정면의 "경렴정(景濂亭)" 행서 현판글씨는 주세붕이 직접 쓴 글씨로 전하고,

 

 

 

정자 안에 걸린 초서체의 현판글씨는,

김구, 양사언과 함께 "3대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가 퇴계의 요청에 따라 쓴 글씨라고 하는데, 

황기로의 글씨중 초서체 정(亭)자의 꼬리가 힘차게 용트림하는 모양이었으나,

일제때 우리 민족의 기를 꺾는다며 꼬리를 잘랐다고 전하며,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는 경북 구미의 정자 "매학정(梅鶴亭)"에서 소개 되었습니다.

                              구미의 정자 문화재, 매학정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삼문이 아닌 외문으로 되어 있으며 도(道,학문)를 향해 뜻을 세운다는 의미 입니다.

 

 

 

지도문(志道門)을 들어서면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明倫堂)이 동향으로 서있습니다.

 

 

 

서원은 크게 강학(講學)과 제향(祭享)의 두  영역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강학의 공간으로,

소수서원의 건물 배치는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고려 하여 하학상달식(下學上達式)으로 건물을 배치 하여 놓았습니다.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된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榮州 紹修書院 講學堂)"으로,

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군학사(郡學舍)를 옮겨온 것으로,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은 한쪽에만 있는데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 2개를 설치하였고 기단 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 하였습니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고,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으며 건물은 남북으로 길게 동향하여 있으며,

 

 

 

서원 정문인 지도문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계단을 오르면 "백운동(白雲洞)"의 현판을 볼수 있습니다.

 

 

 

마침 소수서원의 강학당 에서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한학 강의가 한창 이여서,

사찰에서 템플스테이를 보는듯 합니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과 온돌방, 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으며,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고,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습니다.

 

 

 

명륜당의 뒤편에는 소수서원의 원장과 교수 제임등이  기거하며 집무를 보던 건물이 있으며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의 집무실 겸 숙소로..

동·서재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양재(兩齋)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입니다.

 

 

 

"날마다 학문을 새롭게 한다"는 일신제(日新齋)의 현판과,

 

 

 

직방제(直方齋)의 현판으로,

직방제는 "언제나 깨어 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일신제, 직방제의 왼쪽에는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인 장서각(藏書閣)이 있어,

책을 으뜸자리에 둔다하여 스승 숙소 우측에 두었는데,

당시 유명한 서원들은 많은 장서를 보관하고 있어 당시에는 현대의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도산서원 907종 4,338책, 소수서원  141종 536 책, 병산서원 1,071종 3,039책 등을 서원에 두었다고 합니다.

 

 

 

일신재와 직방재의 오른쪽에는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가 있어,

 

 

 

독서를 통하여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至樂齋)"로,

 

 

 

지락재(至樂齋)는 학생들 숙소로,

방 하나에 2칸의 마루 뿐으로 아주 소박한 건물이며,

 

 

 

지락재의 마루위에는 많은 시판등이 편액되어 있습니다.

 

 

 

지락재와 함께 "ㄱ"자 형을 이루고 있는 학구제(學求齊)로,

이곳 또한 학생들의 숙소 이며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의미이며,

 

 

 

학구제(學求齊)는 지락재의 곁에 있지만 구조는 서로 달라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마루에 목침을 두고 누워보고 싶습니다.

 

 

 

강학공간을 살펴보고 제향공간을 살펴 봅니다.

소수서원은 서원의 일반적인 배치방식인 강당이 앞에있고 사당이 뒤에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이 아니라,

강당이 동쪽에 있고  사당이 서쪽에 배치된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독특한 배치로 지어 졌는데,

이는 서원의 일정한 배치 형태가 정해지기 전에 지어진 최초의 서원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배치로 강학당의 왼쪽에 자리한 "영주소수서원문성공묘 (榮州紹修書院文成公廟)"로,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성공묘 (文成公廟)"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1542년 주세붕이 세운 사묘(祠廟)인데,

"사(祠)"라고 하지 않고 "묘(廟)"라 부르는 것은 여기만의 특이한 현상 입니다.

문성공묘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하는 사우로,

1544년(중종 39) 추배(追配)된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그리고 1633년(인조 11) 추향(追享)된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습니다.

 

 

 

문성공묘는 문이 닫혀있어 들어갈수 없어 담장너머로 들여다 봅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의 현판은 주자(주희)의 후손인 주지번(朱之蕃)이 썼는데,

명필로 소문난 명나라 주지번이 선조때인 1606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현판 글씨를 썻으며 소수서원에도 들러 참배를 하고 문성공묘(文成公廟)의 글씨를 남겼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차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습니다.

 

 

 

 

문성공묘의 주향인 안향(安珦,1243~1306)은 고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86년(충렬왕 12) 왕과 공주를 호종(扈從)하여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보고 주자학을 연구 했으며,

섬학전(贍學田)이라는 육영재단을 설치하였고,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孔子)의 영정을 모셨으며..

제기(祭器), 악기와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史) 등의 서적을 사들이는 등 주자학의 도입과 정착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일컬어 집니다.

 

 

 

직방재 뒤편에는 영정각(影幀閣)이 있어,

영정각은 불교(佛敎) 사찰(寺刹)이라면 조사전(祖師殿)에 해당하는 전각 입니다.

 

 

 

영정각 앞쪽 공간에는 막대기를 끼워 그림자로 시간을 재던 해시계인 일영대(日影臺)를 볼수있으며,

 

 

 

영정각(影幀閣)은 1975년에 새로 지어,

주자, 문성공 안향, 주세붕, 한음 이덕형 등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어,

 

 

 

전면에는 회암(晦菴) 주자(朱子)를 왼쪽에 모셨고,

오른쪽에는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晦軒影禎)으로 사실상 이곳 영정각의 주인은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초상(肖像) 입니다.

 

 

 

전면에서 보아 왼쪽에는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영정을 모셨고,

 

 

 

오른편에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초상을 모셨는데,

주세붕초상(周世鵬肖像)은 보물 제717호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이곳의 초상화는 모두 모사본을 제작해 두었습니다.

 

 

 

주세붕(周世鵬,1495(연산군 1)∼1554(명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 남고(南皐), 무릉도인(武陵道人), 손옹(巽翁)이며,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 하였으며,

그 뒤 승문원정자로 사가독서에 뽑히고, 홍문관의 정자·수찬을 역임하였고 공조좌랑, 병조좌랑, 강원도도사를 거쳐 사간원헌납을 지냈습니다.

1537년 김안로(金安老)의 전권을 피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으며.

이듬해 검시관(檢屍官)으로 남형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 되었다가,

어머니의 사망으로 여묘 3년, 상제(喪祭)의 예는 모두 "가례(家禮)"에 따랐으며,

승문원교리, 예빈시정(禮賓寺正)을 거쳐 1541년 풍기 군수가 되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향교를 이전하고,

사림 및 그들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1543년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紹修書院)을 건립했는데,

중국의 서원과 같이 사묘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지닌 우리 나라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습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사성에 임명되고, 홍문관의 응교·전한·직제학·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548년 호조참판이 되었고 1549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운동서원의 예와 같이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 하였으며,

이후 대사성,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병으로 사직을 요청, 동지성균관사에 체임 되었습니다.

청백리에 뽑히었고 죽은 뒤 소원에 따라 고향인 칠원 선영에 안장 되었으며,

저서로는 〈죽계지 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 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 心圖彛訓〉·〈심경심학도 心經心學圖〉 등이 있고,

문집으로 〈무릉잡고 武陵雜稿〉가 있다. 〈도동곡 道東曲〉·〈육현가 六賢歌〉·〈엄연곡 儼然曲〉 등 장가와 〈군자가 君子歌〉 등 단가가 전하고 있으며,

칠원의 덕연서원과 소수서원에 배향 되었고,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 입니다.

 

 

 

영정각의 뒤쪽에는 사료관(史料館) 이 있어,

 

 

 

사료관(史料館)에는 소수서원의 관련자료를 정리하여 전시해 두어,

소수서원의 역사와 전통 및 주요 배출인물 등의 내용을 알수 있습니다.

 

 

 

사료관의 앞뜰에서는 석조불상(石造佛像)의 대좌(臺座)와 주춧돌 등의 불교와 관련한 석물들을 볼수있는데, 

소수서원은 숙수사터에 세워졌기 때문에 불교 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불상들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매우 이른 시기의 것이며,

종류도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神將)상, 공양자상 등 다양하여 아주이른 시기에 지어졌던 사찰임을 알수 있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숙수사(宿水寺)와 관련한 비극적인 속설이 전하는데,

숙수사(宿水寺)에 조선시대에 관군(官軍)의 방화로 절은 폐허가 됐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다는 내용으로,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 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본거지였던 이곳 순흥도호부 사람들이,

토벌군에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하며 소수서원의 지척에, 

당시 화를 입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제사지내는 금성단(錦城壇)이 있으니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사실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서원을 나오며 지락재(至樂齋) 담밖에 있는 못으로 탁청지(濯淸池)를 찾아 봅니다.

탁청지(濯淸池)는 1593년(선조 26) 겸암(謙菴) 류운용(柳云龍)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으로,

후일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군수로 부임하여 다시 판 기록이 남아 있으며,

연못이 장방형의 형태로 되어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듯 보입니다.

 

 

 

경렴정(景濂亭) 동쪽에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죽계 건너편에는 물가로 튀어나온 경자바위(敬字岩)가 있어,

경자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경(敬)”자는 유교의 근본정신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리글자이며,

경자바위에는 인근의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과 관련한 애틋하고 슬픈 사연이 함께 전하고 있어,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참절당한 제 의사들의 시신을 죽계천 백운담에 수장시킨 후로는.

밤마다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므로 유생들이 밤 출입을 꺼리자,

주세봉이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敬)”자의 글자 위에 붉은 칠을 하여 제를 드리니 그때부터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취한대 윗쪽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는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쓴 글씨로,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이곳에 송백과 죽을 심어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짓고,

주세붕(周世鵬)의 "경"자 위에 '백운동(白雲洞)" 석 자를 써서 음각하고 이곳의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죽계천(竹溪川) 건너에는 이황(李滉)의 취한대(翠寒臺)가 있어,

취한대(翠寒臺)는 이황(李滉)이 세우고 손수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 등을 심어서 꾸민 곳으로,

 

 

 

오랜 세월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1986년에 지은 정자로,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수많은 유생과 선비를을 배출 했으며,

주자학의 뿌리와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 등을 살필수 있는 곳으로,

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을 돌아볼수 있는곳으로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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