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護國) 보훈(報勳)의 달 6월에,

지난해 다녀온 충남 예산의 "윤봉길(尹奉吉) 기념관"의 지난 자료가 있어,

당시의 방문을 더듬어 회상하며 올려 봅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전경으로,

머리에 무궁화 문양의 모자를 쓰고 부리부리한 눈에는 한반도의 모습이 보이는 천하대장군의 늠름한 모습이 보이고,

"상무사(商務社) 보부상 유품전시관"이 자리해 있어,

보부상 유품전시관의 내용을 보시려면..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보부상 유품전시관_170508

 

 

 

언덕쪽에는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비(梅軒 尹奉吉義士 事蹟碑)가 보이고,

1968년에 건립된 윤봉길의사의 사당인 충의사(忠義祠)가 자리해 있으며 길건너에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생가가 있습니다.

윤봉길의사 생가와 관련한 내용은 따로이 올립니다.

 

 

 

2001년 12월에 개관된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기념관으로,

 

 

 


일구로 들어서면 비장한 모습으로 서있는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의 모습을 만날수 있고,

 

 

 

불꽃같이 살다간 독립혼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의 흉상을 볼수 있어,

 

 

 

윤봉길(尹奉吉,1908~1932)은 일찍부터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다음에는 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축하기념식장에서 폭탄투척 의거를 펼쳐 중국침략의 수괴들을 대거 살상하였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임시정부는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1층으로 되어있는 기념관에는 매직 비젼 3대로 출생, 농촌 부흥운동,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장면 등,

윤봉길 의사 25세의 일대기를 생생하게 재현했으며,

트라이 비젼, 영상물, 입체모형, 각종 전시물, 체험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차례로 돌아 봅니다.

 

 

 

기념관에는 거사 직전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작별할 때 정표로 주고받은 회중시계와,

당시 소지했던 중국 돈과 지갑, 도장, 안경집 그리고 일기책, 월진회 창립취지서,

상해에서 보낸 편지 4통, 형틀대 등 유품(보물 제568호 총 30종 56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중국으로 가기전 이곳에서의 농촌계몽운동 모습으로,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벌어진 3·1운동을 보고 식민지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 했으며,

1920년에는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최병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그 다음해에는 성주록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 했습니다.

이후에는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며 농촌개혁에 눈을 떠서,

1928년 증산운동·부업장려 및 생활개선을 통해서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부흥원을 조직하는 한편,

청소년들의 심신 단련을 위한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설립하고 1929년에는 상부상조를 위한 위친계를 조직 했으며,

월진회(月進會)라는 계몽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어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 주력 했으며,

1928년 대한독립군단의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이흑룡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전선의 형세를 전해 듣는 한편,

1929년 2월 부흥원 낙성을 기념하는 학예회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비난하는 풍자극으로 덕산주재소에 호출당하는 등 감시대상이 되었습니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만나는 과정 등을 전시해둔 곳으로,

 

 

 

상해에서 유물로 윤의사가 거사 이틀전,

김구(金九)에게 전한 이력서등의 유물이을 볼수 있으며,

 

 

 

김구(金九)를 만나 한인애국단 입단의 사진을 볼수 있어,

윤봉길(尹奉吉)은 "사내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丈夫出家生不還)"는 비장한 각오를 적은 편지 한 장만을 남겨서,

윤 의사의 처절한 조국애를 실감하게 하는데 중국으로 가던 윤봉길은 평안도 선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달포 가량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만주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를 두루 살펴보다가,

1930년 12월 칭다오(靑島)에 정착해서 이듬해 여름까지 낮에는 교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밤에는 야간노동강습회에서 활동했으나..

1931년 7월 일본이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 구실로 일으킨 완바오 산 사건(萬寶山事件)을 보고,

8월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서 애국지사 모임인 한인애국단에 가입 했습니다.

 

 

 

이듬해인 1932년 4월 29일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계획아래 일본 천황의 생일(天長節)을 맞아,

상해 홍커우(虹口.현 루신공원)공원에서 상해사변의 승리를 자축하는 일본의 전승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 했는데,

이때의 폭탄은 중국군 대령으로 있던 김홍일이 준비해주었다고 하며,

윤 의사의 의거로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시리카와(白川儀則) 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이 중상을 입히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는,

상하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고 같은해인 1932년 5월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1932년 5월 25일 상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1월 20일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같은해 12월 19일 25살의 젊은 나이로 총살 되었습니다.

 

 

 

보물 제568-11호로 지정된,

"윤봉길의사유품 - 형틀대 (尹奉吉義士遺品 - 刑틀臺)"이며,

 

 

 

전시관에는 윤봉길의사의 많은 유물들이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을 나오면서 만날수 있는 포토존으로,

모형과 그림등으로 기념사진을 남길수 있습니다.

 

 

 

호국(護國) 보훈(報勳)의 달 6월에 살펴보는,

충남 예산의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기념관으로 길 건너에는 생가가 있으며 ,

예산을 여행하시면 수덕사, 추사고택과 더불어 찾아 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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