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창(居昌)의 문화재 탐방에서,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위치한 "만월당(滿月堂)"을 찾았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0호로 지정된 만월당(滿月堂)의 대문채 이며,

 

 

 

대문채를 들어서면 왼쪽에 만월당(滿月堂) 이 모습이 들어오고,

 

 

 

만월당(滿月堂)의 뜰에는,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순절한 정용(鄭庸, 1539~1593) 의사의 유적비가 있어,

비석에는 "충순위 내금위장 의사 중재 진양 정공휘용유적비(忠順衛內禁衛將義士中齋晉陽鄭公諱庸遺蹟碑)"라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1964년 김황이 지었습니다.

비석의 주인 정용(鄭庸)은 1539년 10월 1일 갈천리 본가에서 태어났으며 천성이 올바르고 굳은 심지를 가진 그는,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하였으며, 의기가 높아 큰 뜻을 지니고 용맹이 뛰어나,

임진왜란을 당해서 큰 성이며 고을이 와해되고 감사와 수령들이 뿔뿔이 흩어져 숨어버리자,

정용은 형의 아들인 정익주와 정광주, 사촌 형의 아들들, 그리고 가솔 수십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김면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당시 평양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선조 임금이 평안북도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은,

김면에게 청하여 자기에게 소속된 의병을 거느리고 낙동강 하류의 일본군을 추격하여 토벌하겠다고 했으며,

이에 김면은 정용의 연로함을 들어 만류했으나 정용은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곧 나의 뜻이라고 말하고 달려 나가,

일본군의 깃발을 꺾고 십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일본군이 소지했던 여러 가지 물자를 노획하여 김면에게 주자,

그는 정용을 장하게 여겨 그 소식을 영문(營門)에 보고 했습니다.

김면 사망 후에 정용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주로 가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최경회는 정용의 충의를 장하게 여기고 공로를 치하하며 “한 고을의 외로운 성이 그대를 얻어 든든하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마음을 함께하여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자고 맹세 했으며,

당시 병사 황진(黃進), 김천일(金千鎰), 의병장 임계영(任啓英), 복수장 고종후(高從厚)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정용의 계책과 지략을 듣고 칭찬해 주었다고 전합니다.

일본군이 1593년 6월 재차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조선군과 의병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고,

1593년 6월 29일 성을 지키던 정용은 두 조카와 함께 촉석루 밑으로 투신, 자결 했으며 정용의 나이 55세 였습니다.

 

 

 

연못을 앞에 두고 있는 만월당(滿月堂)으로,

 

 

 


만월당(滿月堂)은 1573년(선조 6년)에 직장 벼슬을 한 만월당(滿月堂) 정종주(鄭宗周,1573~1673)를 기리기 위하여, 

1666년(현종 7)에 세운 건물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786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건물 구조의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가운데 2칸에 대청을 두고 좌우로 1칸씩 방을 두었으며 겹처마의 맞배지붕의 구조 입니다.

 

 

 

마루위 처마 아래에서 볼수있는 "만월당(滿月堂)" 현판이며,

 

 

 

옆에 "팔완당(八玩堂)"의 현판도 함께 걸려 있어, 

팔완당은 첨정(僉正)을 역임한 팔완당(八玩堂) 정몽서(鄭夢瑞)를 기리기위한 건물로,

팔완당은 북상면 농산리 204번지에 있었는데 이 건물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완월당에 통합, 복원 되면서 이곳에 함께 남게 되었습니다.

 

 

 

만월당(滿月堂)의 마루에는 3개의 편액을 볼수 있어 살펴보면,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시(詩) 두수를 새긴 시판(詩板)이 있으며,

 

 

 

"만월당중건사실(滿月堂重建事實)" 편액으로,

 

만력 을묘 후 사 을묘 사월 일(萬曆乙卯後四乙卯四月 日)에 문간공(文簡公, 동계 정온)의 오세손(五世孫) 정박(鄭璞)이,

근발(謹跋, 삼가 발함)하고 만월공(滿月公, 만월당) 육세손(六世孫) 유주(有胄)가 근서(謹書, 삼가 글씨를 씀)했습니다.

 

 

 

만월당기(滿月堂記)의 편액으로,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만월당기(滿月堂記)를,

"만력을묘후사을묘사월신사(萬曆乙卯後四乙卯四月辛巳)"에 중간(重刊, 다시 새김)한 편액 입니다.

 

 

 

만월당(滿月堂)은 1786년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 향토문화의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분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인 장소 입니다.

 

 

 

만월당(滿月堂)은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전, 후면에 쪽마루를 깔고 전면에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기둥은 모두 원주 기둥 입니다.

 

 

 

왼쪽의 방은 열려있어 안을 들여다 보니 정리가 잘 되어 있고,

 

 

 

마루를 건너 왼쪽의 방으로 가 봅니다.

 

 

 

왼쪽의 방은 숟가락을 걸어두어 옛 시골의 정경을 떠오르게 하며,

 

 

 

안을 들여다 보니 제사 또는 집안의 행사에 쓰이는 도구들을 보관하고 있어 얼른 문을 닫습니다.

 

 

 


만월당(滿月堂)은 장식 없이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가구기법 등에서,

중건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건축 자료로 알려져 있으며,

 

 

 

만월당(滿月堂)의 마루에서,

동계집 속집 제1권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만월당(滿月堂)에 제영(題詠)을 부치다"를 가져와 봅니다.

半畝方塘滿月軒  반 이랑 모난 못가의 만월헌이여                    面前光景豁龍門  눈 앞의 광경으로는 용문산이 넓게 트였네

一般淸意人知少  이와 같이 맑은 뜻은 아는 이가 적을 테고        八玩高風有是孫  팔완당의 고풍에 이런 손자가 있었구려

鵩賦愁懷今橘海  제주에 유배된 오늘 슬픈 회포 일어나고          漁舟夢想舊桃源  무릉도원 찾던 옛날을 꿈속에서 생각하오

何時放赦那邊去  어느 때나 풀려나서 그곳으로 달려가서           共對明輝更倒樽  밝은 달빛 함께 대하고 다시 술을 마실까

曾上高軒勸酒多  일찍이 고헌에 올랐을 때 술을 많이 권했는데    更聞新扁爲君歌  편액을 새로 달았다기에 그대 위해 노래하오

東峯桂吐光先入  동봉에 계수나무 토하면 빛이 먼저 들어오고     西嶺蟾傾影不阿  서령에 두꺼비 기울어도 그림자가 굽지 않네

鏡面澄波涵廣漢  거울 같은 맑은 물결은 광한전을머금었고         桐心淸韻感姮娥  오동나무 맑은 소리는 항아를감동시키리

圍中亦見堂中月  이곳 배소에서도 만월당 속의 달을 보나니        一夜思歸鬢欲皤  밤새도록 돌아갈 생각에 귀밑머리 희어지오

 

 

 

마루에서 내려와 만월당(滿月堂)의 뒤편을 살펴보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설명하자면,

마루의 또다른 현판 팔완당(八玩堂)은 정몽서(鄭夢瑞)의 것이고,

정몽서(鄭夢瑞)의 차자(次子) 의사(義士) 정용(鄭庸)은 비석을 통해 살필수 있으며,

팔완당(八玩堂)의 손자는 만월당(滿月堂) 정종주(鄭宗周)로 이곳 만월당(滿月堂)의 주인 입니다.

 

 

 

만월당(滿月堂)은 방의 전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 좌측 방의 좌측면과 뒷면에는 외여닫이 세살문,

방의 대청 쪽에는 외여닫이 굽널세살문을 달았으며 가구는 5량가구 형식, 공포는 초익공 형식이며,

평면 형식이나 장식이 없는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가구 기법 등에서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입니다.

 

 

 

만월당(滿月堂)을 나오면서 방 두 칸과 창고가 있는 대문채를 들여다 봅니다.

 

 

 

만월당(滿月堂) 맞은편에 홍살문이 서있고,

 

 

 

안쪽에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들여다 봅니다.

 

 

 

사당의 현판은 효우사(孝友祠)이며,

진양정씨 은열공파의 사당으로 앞의 만월당(滿月堂)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경남 거창(居昌)은,

산수가 수려하고 조선시대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그로인해 수려한 정자와 고택들을 만날수 있는곳 입니다.

진양정씨의 충절과 지역의 향토문화를 살펴볼수 있었던 곳으로,

거창의 만월당(滿月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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