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으로의 문화재 탐방길에,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일두고택(一蠹古宅)"을 찾았습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된 일두고택(一蠹古宅)은,

경남 함양군 지곡면의 전형적인 양반 씨족 마을인 개평마을에서 찾을수 있으며,

 

 

 

일두고택으로 들어가는 마을의 초입에는,

정여창(鄭汝昌) 기념관이 자리해 있어,

이곳에서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에 대해 상세하게 알수있어 찾아 봅니다.

 

 

 

정여창(鄭汝昌, 1450년 음력 5월 5일 ∼ 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로..

자는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1달간 전장터를 떠돌며 그 시신을 찾아서 예장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 하였으며,

그 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 되었습니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지역의 청년들과 학동들을 데려다가 성리학을 가르치고,

지역의 유지들을 만나 한성부와 시국담론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변방 지역에도 학문과 문물을 전파 하였으며,

1504년 종성 유배지에서 향년 54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 뒤 연산군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관참시를 겪게 됩니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 되었으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에 들었습니다.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등에 제향 되었고 저서로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습니다.

 

 

 

정여창(鄭汝昌) 기념관은 단층의 작은규모 이지만,

김굉필(金宏弼, 1454~ 150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이언적(李彦迪, 1491~ 1553), 이황(李滉, 1501~1570)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5현이라는 동방오현(東方五賢)에 들었던 정여창(鄭汝昌)은 조선역사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임을 알수 있습니다.

 

 

 

양반대가로서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경남 지방의 대표적인 고택(古宅)의 면모답게,

입구의 솟을 대문이 격이 다름을 이르는듯 하며..

 

 

 

일두고택(一蠹古宅)의 대문을 들어서면,

문안에 붉은색을 칠한 얇은 기둥의 홍살문이 보이고 여러개의 편액을 볼수 있는데,

 

 

대문 위에는 5개의 충신, 효자 정려패가 걸려 있어,

정려편액은 효자 4명과 충신 1명으로 가장 위의 것은 일두(一蠹)의 할아버지 것이며 나머지는 후손의 것으로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일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는데,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해 내리는 패로 다섯개가 걸린 집은 전국에서 "일두고택(一蠹古宅)"이 유일 하다고 합니다.

 

 

 

대문의 바닥은 박돌을 깔아두어 조심스럽게 다녀야 하며,

고택(古宅)의 위상을 알리려는듯 돌로 된 문턱이 높게 여겨집니다.

 

 

 

안으로 들어가며,

일두고택(一蠹古宅)의 배치도를 먼저 살펴 봅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고택(古宅)의 사랑채가 먼저 들어 오는데,

일두고택(一蠹古宅)은 정여창(鄭汝昌)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고,

3,000여 평의 대지에 잘 구획된 12동(당초 17동)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 입니다.

 

 

 

사랑채 왼쪽 처마 에서는 "문헌세가(文獻世家)"의 현판을 볼수 있고,

 

 

 

겨울의 찬바람을 막기 위해서 미닫이와 여닫이를 겸한 2중창의 모습으로,

조선후기 고택(古宅)에서 많이 보았던 모습으로 일두고택(一蠹古宅)은 1500년대 후반이나 1600년대 초반에 지어졌으나,

세월의 흐름으로 중수를 하면서 변화가 있은듯 합니다.

 

 

 

사랑채는 건물로서의 완성도가 매우 높은 편으로 우람한 툇보,

툇보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굵은 두리기둥,

툇마루에까지 해 단 고급스러운 난간 등으로 세심하게 신경을 쓴 건물임을 알수 있습니다.

 

 

 

사랑채의 중앙의 처마 밑에는, 

큰글씨의 "충효절의(忠孝節義)"의 글귀가 있어 고택(古宅)의 품위를 더높여 보려는 의도로 보이고,

 

 

 

사랑채의 누마루에는 의자와 탁자를 두었는데,

 

 

 

안쪽에는 "탁청재(濯淸齋)"의 현판이 있어,

탁청재는 "마음을 푸르게 닦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제법 크게 돌로 쌓은 정원의 산인 석가산(石假山)이 자리해 있어, 

자연을 사랑채의 마당에 들여 마당이 자연을 품게한 선비정신을 볼수 있고,

 

 

 

정여창(鄭汝昌)은 명성에 비해 글을 거의 남기지 못했는데,

정여창이 사화에 연루되어 곤경에 빠지자 가족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그의 글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의 글이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그의 학문적 성과가 좀 더 뚜렷하게 역사에 기록됐을 테지만,

실천을 중시하던 당시 유학에서 그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산이 되었기에 동방오현 중 한 명으로 존경을 받게 된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두류산(頭流山)에 복축(卜築, 터를 골라서 집을 짓는 것)할 적에 정여창(鄭汝昌)이 지은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風蒲獵獵弄輕柔   바람에 부들이 휘날리어 가볍고 부드럽게 희롱하는데 

四月花開麥已秋   사월에 화개(땅 이름)에는 보리가 벌써 가을일세 

觀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 골짜기 다 구경하고서 

扁舟又下大江流   조각배로 또다시 큰 강 흐름에 내려가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에 내루가 앞 쪽으로 달린 전출 구조이며,

내루는 구조가 간결하면서도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고 가늘고 긴 석주(石柱)를 초석으로 삼았습니다.

 

 

 

누마루 아래는 판벽을 둘러 고방으로 쓰는 실용적인 면도 보이는데,

사랑채의 마루아래에서 볼수있는 시건장치 에서도 품격이 보이는듯 하며,

 

 

 

사랑채 누마루는 네모 기단에 원기둥으로 세웠으며 그 사이의 팔각기둥이 땅과 지붕을 잇는데,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등 누마루는 천지 만물을 하나로 담아낸 것으로 우주의 중심을 표현한 만큼 사랑채는 건실하고 완벽하게 여겨지며,

 

 

누마루의 아래 목재의 결구에서도 장인의 솜씨를 엿볼수 있습니다.

 

 

 

창과 문으로 밀봉된 사랑채에는 어떤 틈도 보이지 않는데,

비어 있기 마련인 누마루와 대청, 그리고 툇마루 아래까지도 나무 판을 둘러 쳤으며,

인방 위에는 작은 접시 모양의 부재인 소로를 얹어 집의 격을 높였고 툇마루 쪽의 짧은 보인 툇보 역시 유려한 곡선으로 힘이 넘쳐,

결구 등에서 완벽에 가까운 솜씨를 볼수 있습니다.

 

 

 

일두(一蠹)는 정여창 스스로 지은 호(號)로서,

"한 마리 좀벌레"란 의미로 자신을 한없이 낮춘 대유의 겸양을 느낄수 있습니다.

 

 

 

정여창(鄭汝昌)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록 등에 여럿 전해 내려 오는데,

무관인 아버지가 난을 일으킨 이시애에게 죽임을 당하자 전쟁터까지 달려가서,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들을 일일이 들춰 보고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해 돌아왔다든가,

전염병에 걸린 어머니를 바로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도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있고,

어머니가 소 잡는 일을 보고 놀랐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

실천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유교를 뿌리내리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미담에 감동한 임금이 정여창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번번이 이를 거절하였는데,

당연한 일을 하고 이를 구실로 벼슬을 얻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으며,

그래도 거듭 벼슬이 주어지자 그가 선택한 길은 과거 였는데 이유는 단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기 때문 였습니다.

 

 

 

사랑채 옆의 일각문을 거쳐서 안채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어 들어가면,

 

 

 

일각문을 들어서면 또 한번 중문을 통과해야 하고,

 

 

 

두개의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모습이 들어오며,

 

 

 

남향한 "一"자(字)형의 큼직한 안채는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개방적으로 분할되어 집이 밝고 화사하게 느껴지는데,

안채 좌측으로는 아래채가 있고, 뒤편으로는 가묘(家廟)와 별당, 그리고 안사랑채가 따로 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2칸의 "一'자형의 건물로,

1670~1680년 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채의 왼쪽에는 부엌이 있어,

부엌문 위의 윗창도 특이 하지만 양개의 부엌문의 아랫부분이 둥근형태를 이루고 어 눈길이 머물고..

 

 

 

문 위에는 개두릅으로도 불리는 엄나무 가지를 걸어두어,

가시가 많은 엄나무를 걸어두면 귀신이나 전염병, 잡기운이 근접하지 못하고 나쁜기운을 막아 준다는 풍습의 하나 입니다.

 

 

 

부엌을 들여다 보니 옛 손길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세간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정여창 고택은,

양반가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며, 정여창 고택의 유적 명칭은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이라고도 합니다.

 

 

 

안채의 대청마루에 잠시 쉬면서,

명성(名聲)의 인물과 명품고택 분위기에 빠져 봅니다.

 

 

 

일두고택(一蠹古宅)은 1987년 TV 대하드라마 "토지", 2003의 "다모" 등의 촬영 장소로 이용되면서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문화유적 탐방객들의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좌(左)안동, 우(右)함양"이라 일렀는데, 

낙동강을 기준으로 동쪽의 안동(安東)과 서쪽에 있는 함양(咸陽)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안채 뒤편에는 작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화단이 있고,

 

 

 

안채의 굴뚝과 담장, 그사이에 심어둔 키작은 꽃나무들의 배치가 정겹습니다.

 

 

 

고택(古宅) 답게 장독대에는 요즘 보기힘든 크고 오래된 장독들을 볼수 있으며,

 

 

 

안채에서 높은 토담의 담장을 지나면,

 

 

 

고택(古宅)의 안쪽에 위치한 사당인 가묘(家廟)가 자리해 있고,

 

 

 

사당으로 들어가기전 오른편에는 고방으로 보이는 큰 창고가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중간에 위치한 별채로,

이곳은 처음에는 안사랑채로 알려졌지만 사랑채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여 안채에 속한 사랑채라고 보기는 힘들어, 

사랑채를 찾았던 손님들이 돌아갈 때를 놓치거나 유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을것으로 여겨집니다.

 

 

 

배치도를 보면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길을따라 돌다보면 배치도의 이해가 금방 들어오며,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사상과 평품고택을 돌아 볼수 있으며,

고택체험으로 행랑채 방 4개와 안사랑채, 사랑채는 숙박이 가능 하다고 하며,

영남 남부의 대표적인 대가를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경남 함양의 일두고택(一蠹古宅)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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