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扶蘇山城) 돌아보기에서

산성의 입구인 매표소가 있는  부소산문을 출발하여 반월루까지 돌아 보았고,

반월루(半月樓)를 출발하여 낙화암(落花巖)등을 경유하여 구드래나루 까지의 여정을 담아 봅니다.

부소산문에서 반월루까지의 내용을 확인 하시면 아래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돌아보기(입구에서 반월루까지)_180701

 

 

참고로,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배치도로 위치를 살펴 봅니다.

 

 

 

반월루(半月樓)를 경유하여 부소산성(扶蘇山城)길을 따르면,

 

 

 

사방이 트여있어 부여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누각인 사자루로도 불리는 사비루(泗庇樓)를 만나게 되어,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인 사자루(泗疵樓)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사자루(泗疵樓)는 해발106m의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送月臺)가 있었던 곳으로,

영일루가 일출을 보는곳이라면 이곳은 왕과 귀족들이 달을 보며 하루의 국정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이며,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비루(사자루)라 이름하였는데,

건물을 세울 때 이곳에서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보물문화제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사자루(泗泚樓)의 현판을 볼수있고,

 

 

 

높은곳에 자리해서 인지 누마루로 오르지 않아도 시원함을 느낄수 있는 사자루의 누아래 이며,

 

 

 

마루에 오르면 여러 시판과 기문을 볼수 있어,

부여회고 (扶餘懷古)의 편액으로,

백제도성총고 (百濟都城摠古)   백제 도성이 모두 옛 언덕이 되었구나. 

구상전벽해사 (丘桑田碧海使)   상전이 벽해가 되었으니 시름 겨워라.  

인수천정무형 (人愁天政無形)   천정은 형체도 없으나 산 모양은 역력하고

산역역군창여 (山歷曆軍倉如)   군창터는 꿈같지만 강물은 유유히 흐르네  

몽수유유화락 (夢水悠悠花落)   꽃이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니 천년 눈물이요

고암천재루용 (高巖千載淚龍)   용이 백마를 삼키니

탄백마일조추 (呑白馬一朝秋)   하루아침에 스러졌구나     

삼충의백금래 (三忠義魄今來)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넋을 오늘 와서 조문하니   

조홀억라강경 (吊忽憶羅江競)   문득 라강을 다투어 건너던 배 생각나는구나. 

도주 (渡舟)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거인(潘南居人) 금운 정순규(錦雲 鄭淳圭)

 

 

 

사자루에 판상되어 있는 송용재(宋龍在, 생몰년 미상)의 판상시로,

半千基業作荒丘   5백 년 터전이 황량한 언덕이 되니

滿木山河摠是愁   눈에 가득한 산하가 모두 근심이네.

落花孤巖春寂寂   낙화암 외로운 바위는 봄날에도 적적하니

龍亡大洋水悠悠   용은 죽고 큰물만 유유히 흐르네.

管絃當日繁華地   그때는 풍류가 번화하던 땅이었으나

漁逐斜陽慘憺秋   해 질 무렵 어부가 고기 잡는 참담한 가을날

白髮那堪今古淚   백발이 된 지금 눈물 견디기 어려워

滄浪一曲更回舟   창랑가 한 곡조 부르며 배를 다시 돌리네.

송용재(宋龍在)는 구한말의 이 지역 선비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하는 인물 입니다.

 

 

 

누각의 마루에는 여러 기문과 시판(詩板)이 올려져 있으며,

한글이 혼용된 1990년의 사자루중수기(泗疵樓重修記)의 현판을 볼수 있습니다.

 

 

 

사자루(泗疵樓)의 천정에는 화려한 단청을 볼수있고,

 

 

 

누각의 마루에서 보이는 풍광으로,

아랫쪽으로는 부여 시가지의 일부와 서해로 내려가는 백마강이 들어오고,

 

 

 

윗쪽으로는 가증천과 백마강의 합류지점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자루(泗疵樓)는 부소산 서쪽 봉우리 정상의 달을 보내서 "송월대(送月臺)"라 불리는 봉우리에 자리하여,

이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아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將臺)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자루는 1919년 당시 부여군수인 김창수가 주도하여 임천 문루인 배산루(背山樓)를 옮겨와 지었습니다.

 

 

 

사자루에서 낙화암으로 가는길은 내리막길을 조금내려가야 하며,

 

 

 

낙화암 위에 자리하고 있는 충남문화재자료 제108호 백화정(百花亭)으로,

백마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낙화암 정상바위위 육각으로 1929년에 세워진 정자로,

백화정의 현판은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1875~1947)의 글씨이며,

 

 

 

백화정(百花亭)은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인데 "백화정"이란 이름은 소동파(蘇東坡)의 시에서 가져 왔다고 합니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110호 낙화암(落花巖)은 부소산 북쪽의 절벽으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여인들의 절개를 지키려고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고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부소산성(扶蘇山城)의 명소중 한곳이며,

 

 

 

부여를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白馬江)은,

전설에 의하면 용이 되어 백마강에 숨어있던 무왕(武王)이 당(唐)나라 군인들을 괴롭히자,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조룡대 바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합니다.

 

 

 

낙화암에서 되돌아 나와 고란사를 향해 발길을 잡습니다.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高蘭寺, 皐蘭寺)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된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며,

현 사찰 건물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전하며,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가,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어 가는 길목에 암벽에 기대어 서있는,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인 삼성각(三聖閣)을 볼수 있고,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자라고 있어,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고란초의 전설이 유명하며,

백마강을 바라보는 고란사(高蘭寺)는 주위경관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합니다.

 

 

 

갈증도 축일겸 약수를 마시기 위해 고란정(皐蘭井)으로 들어가 봅니다.

 

 

 

가족 나들이로 이곳을 찾은 분들이 먼저 와있어,

아내와 두아이를 위해 물을 뜨는 아빠의 뒷모습이 렌즈에 잡힙니다.

 

 

 

암벽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백제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오는 고란정(皐蘭井)의 약수로,

 

 

 

고란약수에는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있어,

늙도록 자식이 없는 할머니는 자식을 갖고 싶어 할아버지에게 고란약수를 마시게 하여 회춘을 시도 하였는데,

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고 하였는데 할아버지는 너무 많이 마셔서 어린이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고란사에서 내려와 구드래나루로 가기위해 고란사 선착장으로 내려옵니다,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관광지여서 유람선 나룻배의 모습도 기와집을 들인 선실의 배로,

 

 

 

고란사 선착장을 출발하면,

낙화암 아래의 백마강 물굽이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용을 낚았다는 설화로 유명한 조룡대(釣龍臺)가 있으며,

 

 

 

고란사 선착장과 그 위의 낙화암의 일부가 들어옵니다.

 

 

 

유람선은 낙화암 아래를 천천이 운행하여,

낙화암 일대를 살펴볼수 있도록 배려 하는듯 합니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보는 낙화암은,

전망대에서 내려 볼때보다 더 웅장하고 높아 보이는데,

절벽위 낙화암 옆에는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천년송이,

백제여인들의 절개를 지키듯 늠름한 자세로 묵묵하게 서있는 모습이 들어 옵니다.

 

 

 

도착지인 구드래나루로,

구드래나루터는 사비시대 백제 도성의 포구로 중국이나 일본의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가에 있는 부여 구드래 일원은 명승 제6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날의 구드래나루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비성으로 진입하기 쉽고 나루로 이용하기 좋은 장소라면 이곳으로 여겨지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사비수(泗?水) 언덕에는 돌 하나가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했다.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가서 부처께 예를 드리려 할 때에는 먼저 그 돌 위에서 부처를 향해 절을 하니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하여

그 돌을 자온대(自溫臺)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구드래는 자온대에서 구들돌이 연유되고 다시 구드래로 변한 것으로 추정 하고 있습니다.

 

 

 

사비백제의 도성(都城)인 부소산성(扶蘇山城)을 찾아,

산성에 산재해 있는 유적들을 살펴보고,

산책하듯 입구인 매표소에서 구드래나루 까지 돌아 보았는데,

휴일이지만 우중(雨中)여서 호젓하게 다녀올수 있었던,

충남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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