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울진을 여행하면서,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 있는 격암 남사고 유적지 (格菴 南師古 遺跡址)를 찾았습니다.

 

격암 남사고 유적지 (格菴 南師古 遺跡址)의 모습으로,

인근에 유명한 성류굴이 있으며 유적지 앞으로는 물맑은 왕피천이 흐르는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유적지는 "남사고 생가터"와 "격암기념관", "치격사" 와 "수남정사", "자동서원"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울진군과 울진문화원 중심으로 남사고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 이라고 하며, 

유교문화권 관광개발 사업으로 2006년에 준공하였다고 합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를 기리는 서재인 자동서원(紫洞書院)이 마주하고 서있으며,

 

 

 

자동서원(紫洞書院)의 현판이며,

 

 

 

현판 한쪽에는 주먹보다 큰 벌집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 유적지(遺跡址)를 찾는이가 그리 많지 않음을 일러주는듯 합니다.

 

 

 

자동서원(紫洞書院)은 정면5칸, 측면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의 구조로,

전면에 긴마루를 두었으며 가운데 세칸은 우물 마루를 깔고 양쪽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마루의 오른쪽 방의 모습이며,

 

 

 

대청마루를 건너 왼쪽의 방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대청마루로 향하는 문은 모두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문을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습니다.

 

 

 

서재인 자동서원(紫洞書院)에서 오른쪽에는 강당인 수남정사(水南精舍)가 자리해 있어, 

정면3칸, 측면1칸반의 규모로 맞배지붕의 구조로,

가운데 칸은 우물 마루를 깔고 양쪽에 방을 들여 자동서원과 비슷한 구조 입니다.

 

 

 

수남정사(水南精舍)의 현판이며,

 

 

 

수남정사(水南精舍)앞에는 해월(海月) 황여일(黃 汝一)의 격암(格菴)을 생각하며 쓴 시(詩)가 있어,

有憶南格菴(유억남격암)      海月(해월) 黃汝一 (황여일)

吾年十四至十八    내 나이 열넷 열여덟에 이르러서야

慣見仙鄕長者風    선향(仙鄕)에서 덕망 높은 격암을 볼 수 있었지

月窟天根探獨樂    천근월굴(天根月窟)을 혼자 탐상하고

龜圖馬易玩尤工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더욱 깊이 공부했다네

皇喪謂至明朝後    명나라 황제의 죽음도 미리 알았고

壬亂知生乙卯中    임진란의 위험도 앞서 근심하였지

近者妖星興白氣   요즘에 요성(妖星)과 백기(白氣)가 난무하는데

九原安得起吾公    공을 구원(九原)에서 살려 왔으면 좋겠네

 

 

 

수남정사(水南精舍)와 자동서원(紫洞書院)의 건물을 돌아보고,

옆에 있는 사당인 치격사(致格祠)로 향합니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치격사(致格祠)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구조인 치격사(致格祠)이며,

3칸중 중간은 문이 두짝인 반면 양쪽의 문은 외짝으로 되어 있습니다.

 

 

 

치격사(致格祠) 현판이며,

 

 

 

치격사(致格祠)의 내부는 마루을 깔았고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1509년(중종 4)에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蔚珍郡 近南面 水谷里)에서 태어난 조선시대 학자로,

어릴 때 책을 짊어지고 울진에 있는 불영사(佛影寺)를 찾아 가다가 도승(道僧)을 만나 비수(秘邃)를 전수(傳受)받아,

역학(易學)과 풍수(風水), 천문(天文)을 비롯하여 관상(觀相)의 비결에 도통하여 예언이 꼭 들어맞았다고 하며,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던 학자로 권세와 돈으로 치르던 당시의 과거(科擧)에서 여러 차례 떨어진 뒤에,

벼슬을 하겠다는 꿈을 접고 천문지리(天文地理)와 복술(卜術)을 깊이 연구하여 예언(豫言)이 어긋나지 않았다고 하며,

말년에 관상감(觀象監) 천문교수(天文敎授)가 되어,

63세에 죽기까지 숱한 예언과 일화(逸話)를 남겨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전설에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로 꼽히는데,

1564년(명종19)에 내년에는 태산(泰山)을 봉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이듬해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별세하여 태릉(泰陵)에 장사 지내는일을 예언 하는등 많은 일화로 유명하며..

특히 풍수학(風水學)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사당을 나와 옆에있는 격암기념관(格菴記念館)으로 발길을 잡습니다.

 

 

 

사당 옆에는 격암기념관(格菴記念館)과 생가가 있어,

 

 

 

작은 규모의 기념관 이지만 격암(格菴)에 대해서 많은것을 알아볼수 있습니다.

 

 

 

격암기념관(格菴記念館)의 현판이며,

 

 

 

아담한 규모의 기념관에는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의 영정과,

관련된 서적및 천문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의 영정으로,

격암 남사고는 조선중기의 학자로 본관을 영양이며, 자(字)는 경원.복초.경초라 했으며,

"대학(大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깨달은 바가 있서 호(號)를 격암(格庵)이라 하였는데,

남사고는 대학의 격물치지에서 딴 "격(格)"자로 자신의 호를 "격암"이라 지었는데,

그것은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이치를 궁리하겠다"는 의미 입니다.

 

 

 

풍수가(風水家)나 지관(地官)들이 방위를 헤아릴때 사용한 기구인 윤도(輪圖)이며,

오늘날의 나침판으로 보시면 쉽습니다.

 

 

 

격암(格菴)의 어릴적 일화로,

소년 남사고는 어느 날인가 마을 뒷산을 넘어 물빛 맑은 불영계곡을 따라 걸어서 절 입구에 다 달았을 무렵, 문득 한 노승을 만나게 되어,

그는 “너가 하늘의 이치를 깨칠 자질이 보이므로 비결서를 주려 한다.

한 권은 복서와 관상에 관한 책이고 또 한 권은 천문과 역학을 기록한 책이니라.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면 책에 적힌 것은 천기에 관한 내용들이라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발설하면 집안의 대가 끊어질 터인데,

그래도 괜찮으면 받아라”며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며,

그때부터 수 년여에 걸친 독파에 들어가 조금씩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 했으며,

음양오행의 조화와 신묘함, 풍수지리록을 통해 산과 물, 그리고 방위를 읽어내는 법을 익혔으며 간룡과 장풍, 득수의 묘리를 깨우쳐 나갔으며,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연구를 하던 어느 순간, 예전에 미처 몰랐던 수많은 비밀을 홀연히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세상에 드러내선 안 될 하늘의 비밀을 밝힌 셈 였습니다.

미래의 일을 알 수 있게 된 그는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많은 예언을 남겻고,

소년 시절 비결서를 넘겨준 노승이 책에 적힌 천기를 사사로이 누설치 말라는 다짐을 잊어버린 것으로도 보여지는데,

그래서 나중에 부친의 묘를 명당에 모시기 위해 아홉 번이나 이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는 "구천십장"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 비결서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 노승이 다시 거두어 간 것이라는 설화도 남아 전합니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의 강원도 편으로,

전국지리지로 울진현 인물조항에 실린 남사고의 전기로,

남사고의 임진왜란 예언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박록이란 친구와 소백산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고 깜짝놀라 면서 하는 말이

"저기 동남쪽을 보게.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 않은가?

저것은 임진년이나 계사년에 왜구가 쳐들어와 크게 난리를 일으킬 징조이네.

그런데 만약 임진년에 난리가 일어나면 다시 나라를 구할 도리가 있지만 계사년에 일어나면 다시 구할도리가 없으니 큰일이 아닌가?" 하니,

박록은 "그렇다면 어디로 피난을 가면 살겠는가?" 하고 물으니,

"풍기와 영주가 피난처 이네마는 그 전에 자네와 나는 이미 없을걸세"라고 하니 그 예언이 과연 적중 하였다고 합니다.

 

 

 

1614년(광해군 6) 이수광(李睟光)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峰類說)로,

사후 남사고를 애도하는 조선중기의 시인였던 이달(李達, 1539~1612) 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격암(格菴)의 "이안일기(병시문)"도 진열되어 있으며,

격암은 당시 울진지역의 많은 유림들과 교류를 했는데 시조와 명필로 유명한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강릉 부사로 와 있어 더욱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늘 남사고의 천문과 지리, 음양학 등의 학문적 깊이에 경탄했고, 널리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으나,

남사고의 큰 뜻과 달리 벼슬길은 열리지 않았는데 그후 1564년경 지역의 효성이 지극한 인재들을 발굴하는 "효렴"에 천거되어,

비로소 종9품인 사직참봉직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섰으니, 이때 그의 나이 55세 였습니다.

말년에는 종6품 관상감 천문교수직을 역임 했으며 그와 관련된 행적이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시문과 편지, 묘비명 그리고 후학들이 쓴 글을 모은 "격안선생일고역" 등이 있으며,

후일에도 여러 예언을 남기는 한편 학문연구에도 열중하여 많은 저작들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조선 인조 때 공조참의이자 우국지사인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동서당쟁의 기사를 적은 혼정편록(混定編錄)으로,

남사고(南師古)가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모반사건을 예언한 사실이 기록 되어 있으며,

격암(格菴)의 당파싸움에 대한 이야기로 동, 서의 당파싸움이 일어날 무렵 격암은 이조판서 권이서를 찾아가,

"대감, 큰일났습니다. 장차 큰병이 발생해서 수백년동안 전염될 것입니다.

그 병의 증세를 말하자면 안으로 썩는 것은 내종같고, 허는 것은 당창같고, 온 몸에 퍼지는 것은 여주나역같고, 아픈 것은 치통같고,

더 러운 것은 치질같고, 정신없는 것은 간질같고 파리 모여드는 것은 눈병같고, 뒷골 아픈 것은 임질같읍니다" 하고 고하니

권판서는 "어떻게 아시오?" 하고 물었다.

격암이 말하기를 "그 것은 우리나라의 운명입니다. 서울의 동쪽에는 낙봉이 있고 서쪽에는 안현이 있어 서로 다투는 형세이므로,

반드시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이 생길 것인데 낙은 각마이므로 동인은 반드시 분영한 뒤에 각림할것이고,

안은 혁이안이니 서인은 반드시 개혁한 뒤에라야 편안 할 것입니다" 라고 예언한 것이 틀림없이 맞아 들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와 혼상(渾象)이 진열되어 있으며,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인 혼천의(渾天儀)를 볼수 있습니다.

 

 

 

격암(格菴)은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났으며 천품이 재주 있고 사리에 밝아 경사(經史)에 능통 하였는데,

항상 "소학"을 책상에 두었고 특히 역학, 천문, 지리에 정통하여 기(氣)의 묘를 능수능란하게 관찰 하였습니다.

봉래 양사언(楊士彦)이 "주역(周易)"을 논하다가 남사고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남사고의 깊은 말을 조정에 올리기를 “조정에 멀지 않아 동서분당론(東西分黨論)이 일어나 국가의 근심이 막심하리라” 하였고,

서쪽 하늘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말하기를 “명나라의 천자가 죽는다”고 하였으며,

또한 한참 동안 경건한 마음으로 묵례하니 화창한 날에 사직동(社稷洞)에 기가 서려 있음을 보고 성인이 태어난다고 하여,

국가의 경사가 있음을 예측하더니 후에 덕흥군(德興君)이 탄생하였고 후일 그 당시 생각조차 못했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 선조임금이 되었습니다.

 

 

 

격암기념관(格菴記念館) 옆에는 남사고(南師古)의 생가터를 복원해 두어,

 

 

 

오른쪽에 있는 방의 모습이며,

격암(格菴)의 또다른 일화로 하루는 관상감 "이번신"이 자기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고 하길래,

격암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을 사람은 따로 있소"라고 하였으나,

"이번신"은 재상가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면 하직 인사를 하고 있을 무렵 태사성의 빛이 영영 사라지자 격암은 사망하였는데,

관상감 천문교수직을 끝으로 남사고는 낙향했으며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보리라”라며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고,

평소 즐겨 찾던 불영계곡 주천대와 남수산이 가까운 기슭에 달팽이집 같은 오두막집을 지어 은거 했는데,

자신의 명운이 다했다는 그의 예언처럼 조정을 사직한 다음 해인 1571년(선조 4년)에 향년 63세로 세상을 마감 했습니다.

사후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이 "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 불렀습니다.

 

 

 

정면 4칸 규모의 생가에는 특이하게 부엌이 중간 부분에 있으며,

 

 

 

부엌과 트여진 부분에 1칸 크기의 우물마루가 놓여져 있고,

 

 

 

마루 안쪽에는 작은방 인듯 방을 두었습니다.

 

 

 

왼쪽의 방은 사랑방으로 보이는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용도인 낮은 책상이 있고,

 

 

 

안쪽방에는 병풍이 보이는데,

아마도 바깓방은 서재이고 안쪽방은 침실로 보여 집니다.


남사고의 저서로 알려진 것은 도참서인『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하며,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十勝之地),

이른바 재난의 피신처인 열 곳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기술 하였습니다.

편저에 ≪선택기요 選擇紀要≫가 있고,

또『임광기(林廣記)』와 우주(宇宙)를 그려 벽에 걸어두고 항상 연구해 왔다는,

『완역도(玩易圖)』『상동유초(床東遺草)』·『이기도설(理氣圖說)』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유적지를 한바퀴 돌아 보아도,

휴가시즌의 주말임에도 찾는이가 저 외엔 방문객이 없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동인과 서인의 분당 싸움, 선조(宣祖)의 즉위 등을 예언하여 맞았다고,

살아생전보다 사후에 더 명성을 얻었던 조선의 예언가 격암(格菴)의 생애와 행적을 되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경북 울진의 "격암 남사고 유적지 (格菴 南師古 遺跡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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