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무더위를 피해 대구인근에 있는 청도의 남산계곡을 찾았습니다.

 

어느해 보다 무더운 날씨에다,

비까지 내리지 않아 더욱 무덥게 여겨지는 한여름에는,

섬과 바다를 좋아 하지만 시원한 그늘과 맑은 물이있는 계곡의 유혹이 더욱 강하게 유혹을 합니다.

 

 

 

8월의 첫주말에 찾은 남산계곡은 자리잡기도 함들지만,

주차할 자리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 계곡의 끝자락에 있는 신둔사라는 사찰의,

1km 아랫쪽의 갈림길 안쪽의  남산계곡 윗부분에 해당 되는곳에서 자리를 찾았습니다.  

 

 

 

주차를 하고 화장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니,

남산계곡(南山溪谷) 곳곳에 새겨진 16개소를 소개하는 안내석이 보이고,

남산계곡의 옛이름이 시정(詩亭)골 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연유로는 1498년(연산군 4) 에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士禍)후 고을의 선비들이 남산계곡에 모여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으며,

시제(時題)는 삼성(三聲)으로 수성(水聲), 풍성(風聲), 조성(鳥聲)으로 하고, 

운(韻)은 성(聲), 정자(情子)로 진왈(盡曰)토록 자연(自然)의 품속에서 자연(自然)을 사랑하고 아끼기를 바위에 많은 글을 새겨서 남겨 놓았습니다.

 

 

 

16개의 안내문 가운데 하나를 들여다 보니 "흰 돌이 아름답게 펼쳐진 여울" 이라는 의미의 "백석뢰(白石瀨)"를 소개해주고 있으며,

16개소 가운데 하나인 취암(醉岩)에 새겨진 많은 시구(詩句)를 대하면  자연과 우정을 글로 표현하고 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가장큰 피해자인 김종식(金宗植)과 그의 문하(門下)의 선비들은 아무 세상사 소리(聲)도 듣기 싫었을 것이고,

무고(無辜)하게 희생(犧牲)당한 동문들을 그리는 우정이 감추어져 있음을 느낄수가 있다고 합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해서 찾았던 남산 계곡이,

김종식(金宗植)이후 청도지역 영남학파 선비들의 자주 찾았고,

"시를 짓는 정자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시정골(詩亭谷) 이라는 지방유적이 있는곳임을 알게 됩니다.

 

 

 

안쪽에 있는 팔각의 정자와 주변에도 더위를 피해 오신분들로 가득하고,

 

 

 

자리도 찾을겸 팔각정 안쪽의 계곡으로 들어가면,

너른 반석이 길게 아랫쪽까지 펼쳐져 있고,

 

 

 

그 아랫쪽에 있는 소(沼)옆의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분도 계시고..

 

 

 

윗쪽에 물놀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고,

그 윗쪽에도 여러개의 텐트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야영 자리를 찾아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후기 양식의 정자가 있어,

산수정(山水亭)으로 1893년 천중절(天中節)에 각남면 일곡리 출신의 진사인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 1851~?))가 창건한 정자로,

향내(鄕內)의 사림(士林)들이 수계(修契)하여 선현들의 기질을 계승하여,

봉화(奉和) 선현(先賢)들의 운(韻)대로 작시(作詩)하는 것을 바위에다 수(首)의 시(詩)를 새겨 놓고 있으며,

정자는 풍상(風霜)에 견디다 못하여 도퇴 되고 유허지(遺墟址)만 남아 있었는데 복원한듯 합니다.

 

 

 

산수정(山水亭)의 현판으로,

2011년에 당시 청도 군수였던 이중권(李重根)의 글씨임을 알게되고,

 

 

 

정자 옆앞에는 거다란 바위가 있고 그곳에 암각된 글자가 있어,

 

 

 

바위에 "화악일빈 최익주 호 소강 자 상선(華岳逸民 崔翼周 號 小岡 子 相宣)"이라 새겨져 있어,

최익주(崔翼周)의 아들 때 새겼을 것이라 짐작되며,

 

 

 

산수정(山水亭)을 세운 "최익주(崔翼周)의 본관은 경주이며 각남면 일곡에서 태어나고 1882년(고종 19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대사헌, 우승지를 지낸 화강(華岡) 최학승(崔鶴昇)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의 호를 본받아 소강(小岡)이라 호를 삼았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스로를 화악일민(華岳逸民)이라 하였으며,

1893년 단오날 “옥정동에 산수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뜻에 맞춰 즐거이 지내다가 삶을 마쳤다.(築山水亭於玉井 嘯傲以從)" 라는,

1940년 경상도지리지인 "교남지(嶠南誌)의 기록이 있고,

군의 서쪽 화양면 교촌(校村) 남쪽에 있었으며 진사 최익주(崔翼周)가 창건하였다.

부근 일대는 산이 아름답고 물이 깨끗하여 풍광(風光)이 밝고 아름다우며 시냇가를 따라 큰 반석(盤石)이 몇 리 정도 길게 뻗쳐있다.

가까이에 만옥대(萬玉臺), 석문(石門), 옥정동(玉井洞)이 아주 기묘한 장관이라 그 정경을 이루 글로 적을 수 없다.

군내의 인사들이 계를 맺어 계절마다 풍월을 읊조렸다.

정자는 지금 무너졌다.

(山水亭在郡西華陽面校村 進仕崔翼周所創 附近一帶 山紫水明 風光明媚 沿溪有大盤石 延亘數里如 萬玉臺 石門 玉井洞 頗極奇觀 奇節景不可勝

記 郡中人士修稧 四時嘯詠 亭今廢)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산수정앞 계곡에도 야영 또는 당일의 계곡 나들이 오신분들이 많습니다.

 

 

 

계곡의 물 울덩이가 있는곳 주변에는 어김없이 자리를 펴고 피서를 즐기는 있는 모습이 보이고,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붉은 글씨가 있어,

 

 

 

초서체로 암각된 "유하담(流霞潭)" 글씨로,

유하(流霞)'는 "신선이 마시는 좋은 술"이라는 의미도 있고, 글자 그대로 "흐르는 노을"을 뜻하기도 하여,

이곳의 경치에 취해 술을 마시면 그 술이 바로 유하주일 것이요 햇살에 금빛 노을처럼 일렁이는 물결을 품었으니 그 또한 유하담 일것 입니다.

 

 

 

좋은 경치가 있는 유하담에서 자리를 찾기가 쉬울리 없어 산수정 윗쪽으로 올라가 봅니다.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 산수정(山水亭)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四壁層巒一邊(사벽층만일변)           사방 에워싼 봉우리 한 쪽으로 물 흐르고

茅茨盡日鎖雲煙(모자진일쇄운연)     초가 지붕엔 온종일 구름과 안개가 젖어드네

叱羊道士今何處(질양도사금하처)     질양석의 도사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

落雁遊仙更續緣(낙안유선갱속연)     낙안봉에 노닐던 신선 인연따라 떠났네.

不見纖塵蹊上到(불견섬진혜상도)     보이지 않는 가는 티끌 오솔길에 내려앉고

長留明月石頭眼(장류명월석두안)     밤새 비춘 밝은 달 돌머리에 잠들고

春來莫放桃花水(춘래막방도화수)     봄이 왔다고 복사꽃 핀 물가로 떠돌지 말게

恐被漁郞世外傳(공피어랑세외전)     부질없는 낚시꾼이라 알려질까 두렵다네

 

 

피서로 남산계곡을 찾았을 피서객이 쌓았을 돌탑 부근의,

 

 

 

계곡물이 떨어지고 그아래 소가 있는 주변에,

 

 

 

마침 야영을 마치고 철수 하시는 분들이 있어,

 좋은자리를 자지할수 있었으며,

 

 

 

계곡 바로위의 반듯한 자리에 야영준비를 해두고,

 

 

 

텐트 아래의 웅덩이가 있는 물가로 내려와,

 

 

 

신발을 벗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며 흐르는 땀을 씻어 줍니다.

 

 

 

야영자리는 바람도 많지 않고 어두워져도 찬기운이 없어보여,

플라이를 걷어버리고 잠을 청하였는데 이슬은 내리지 않았지만 새벽녘엔 덮을 침낭을 풀어야 했습니다.

 

 

 

청도의 남산계곡은 야영을 즐기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아,

당일로 오신분들이 철수하는 오후의 늦은시간이면 좋은 자리를 찾을수 있으며,

야영보다 당일의 일정으로 계곡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 입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해서 찾았던,

대구에서도 가까운 편인 남산계곡은 한낮에 냉기를 느낄정도의 계곡은 아니며,

다행이 모기는 없었으나 냉기가 있는 계곡이 아녀서인지 벌레는 제법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청도지역 선비들의 옛 유허(遺墟)가 있는곳으로,

해질녘 부터는 시원함을 즐길수 있었던 청도의 남산계곡(南山溪谷)의 여름 야영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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