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접어 들면서,

경기도 안산을 다녀오면서 찾았던 고송정지(枯松亭址) 입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산 58번지에 위치한 "고송정지"로,

경기도 기념물 제101호로 지정 되었으며 안산지역의 유일한 정자 문화재 입니다.

 

 

 

고송정지(枯松亭址)로 들어가는 길은 차량은 출입하지 못하게 막아 두었으나,

아랫쪽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들어갈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

 

 

 

차량을 통제한 곳에서 6~70m 정도를 걸으면 고송정지(枯松亭址)를 찾을수 있으며,

 

 

 

정자 앞에서 오른쪽에는,

천원지방의 사각은 아니고 삼각형에 가까운 연못이 있으나 물은 말라 바닥을 보이고 있고..

 

 

 

옆에는 조선초 단종복위와 관련한 김충주(金忠柱)의 애환이 있는,

아담한 규모의 고송정지(枯松亭址)가 자리해 있으며,

 

 

 

정자 앞에는 470여년의 노거수 느티나무가 지키듯 서있고..

 

 

 

정자의 뒤편에도 450여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어,

두그루의 느티나무는 고송정지(枯松亭址)의 주인으로,

조선 세조때의 문신인 김문기(金文起)의 손자 김충주(金忠柱,1444~?)가 심었다고 전합니다.

 

 

 

정자 바로 옆에는 350여년의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어,

 

 

 

노거수 느티나무와 향나무로,

이곳이 유적지 였슴을 알려 주는듯 합니다.

 

 

 

고송정지(枯松亭址)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굴도리 집으로 각주(角柱)였으며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이었으나,

원래의 건물은 없어지고,

1936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그 자리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세워졌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건물의 노후로 1992년에 전면 보수하였다고 합니다.

 

 

1456년(세조 2)에 조부 김문기(金文起,1399~1456)와 부친 김현석(金玄錫)이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탄로되어 참화를 받자,

그 아들 충주(忠柱)는 한밤중에 도성을 탈출하여 여러곳을 떠돌다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김충주(金忠柱)는 밤중에 도성을 탈출하여 여러곳을 전전하다가 이곳 화정동에 숨어 살면서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구워파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스스로 호를 탄옹(炭翁)이라 칭하고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립(平笠)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고송정(枯松亭)의 현판으로,

고송정지(枯松亭址)의 뜻은 소나무가 말라 버렸다는 의미로,

조선조 김충주가 단종에 대한 마음이 변할때마다 단종의 묘소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명에 숨진 것을 애통하게 여겨 흘린 눈물에 소나무가 말라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유래합니다.

 

 

 

고송정 전면의 디딤돌을 통하여 마루로 올라봅니다.

 

 

 

마루는 우물마루가 놓여져 있으며,

기둥은 각주(角柱)이며 여러 편액들이 마루위에 올려져 있슴이 보입니다.

 

 

 

팔작지붕에서 볼수있는 우물천정의 모습도 보이고,

 

 

 

마루위에는 고송정중수기(枯松亭重修記)와,

한문의 고송정기록(枯松亭記錄)과 한글이 혼용된 고송정기록등의 편액들이 올려져 있으며,

 

 

 

정자의 마루에서 들어오는길을 내어다 봅니다.

 

 

 

정자앞에는 노거수 느티나무와 추수가 멀지않은 벼의 모습이 들어오고,

 

 

 

왼쪽에는 연못의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

 

 

 

안내문에 탄옹고지(炭翁古址)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하여.

정자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펴 봅니다.

 

 

 

정자 앞에서 왼편에 흙막음용 바위로 보이는 2개의 바위에서,

탄옹(炭翁)과 고지(古址)가 따로 새겨진 암각된 글씨를 찾을수 있으며,

고송정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김충주가 단종을 그리며 울던 망월암(望越巖)이라는 바위가 있다하여 올라 보았으나,

숲이 우거지고 안내문 조차 없어 찾을수 없습니다.

 

 

 

고송정지(枯松亭址)의 주인 김충주(金忠柱,1444~?)의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광보(狂甫), 호는 탄옹(炭翁)이며,

할아버지는 세조때 문신인 김문기(金文起)이고, 아버지는 거창현감을 지낸 김현석(金玄錫)이며, 어머니는 동복오씨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이에 형 김충립(金忠立)과 함께 영읍(嶺邑)의 노비가 되었다가 김충주형제는 이름을 김철주(金哲柱), 김원희(金元希)로 고치고 잠적 하였는데,

김충주는 형과 헤어져 태백산 아래 신두곡(新杜谷)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김충주의 행적을 의심하자,

다시 안산군 광곡리(廣谷里)(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너빌마을)에 이르러 은거 하였습니다.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만들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으며, 스스로 아호를 탄옹(炭翁)이라 하였으며,

그는 단종에 대한 마음이 변할때마다 단종의 묘소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비명에 숨진것을 애통하게 슬퍼하여 흘린 눈물에 소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합니다.

순조27년(1827) 그의 9세손인 진사(進士) 김처일(金處一,1779~1853)이 그 자리에 고송정(枯松亭)이란 정자를 지었으며,

1852년(철종 3)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 되었습니다.

 

 

 

조선조 단종애사(端宗哀史)와 관련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으며,

김충주(金忠柱)의 효심과 충심을 찾아 볼수있는 곳으로,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고송정지(枯松亭址)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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