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으로의 문화재 탐방에서,

조선후기의 정자 문화재 보성 열화정(悅話亭)을 찾았습니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에 우치한 조선 후기의 정자 "열화정(悅話亭)"은,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골마을 안쪽에 자리하여 빼어난 풍광을 느낄수 있는곳 입니다.

 

 

 

정자로 들어가기전,

일각대문과 연못, 그리고 정자로 구성된 열화정(悅話亭)의 배치를 살펴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보성지역의 마지막 탐방지로 이곳을 찾아서인지, 

열화정(悅話亭)에 들어서니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습니다.

 

 

 

열화정(悅話亭)으로 들어가는 일각대문(一角大門)으로,

 

 

 

일각문에는 일섭문(日涉門)의 현판이 있어,

"일섭(日涉)"이란 도연명의 귀거래사 "정원을 거니니 풍취가 있고(園日涉以成聚)" 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일각대문(一角大門)을 들어서려면 대문의 처마를 잗치고 있는 활주(活柱)와 문턱이 눈에 들어오고,

 

 

 

문을 들어서면 자리하고 있는 열화정(悅話亭)의 모습이 들어 옵니다.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는 열화정(悅話亭)은,

1845년(헌종11) 이제(怡齊) 이진만(李鎭晩)이 후진양성을 위해 세웠다고 하며,

 

 

 

정자 앞에는 "ㄴ"자 형의 각이 뚜렀한 연못이 있어,

"선비들의 반듯한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기도 하고,

사각형을 기본으로 한 "ㄴ"자 형태를 하고 있는 연못의 배치는,

열화정의 "ㄱ"자 구조와의 어울림을 위한 구조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연못의 가운데에는 화강암으로 주형물을 세워두어 ,

석가산(石假山)을 의미하는듯 보여지기도 하며..

 

 

 

연못 주변에는 몇 점의 괴석을 볼수 있어, 

이는 정자의 주인이 석물 수집 취미를 가지고 있던 데서 비롯 되었다고 합니다.

 

 

 

열화정(悅話亭)의 현판으로,

1845년 쓰여진 "열화정기(悅話亭記)"에 의하면,

열화정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친척들과 정담을 즐기고, 거문고 타고 글 읽으며 즐기니 시름이 사라지네(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하며,

 

 

 

온돌방 앞에 놓여진 디딤돌을 통하여 마루로 올라봅니다.

 

 

 

정자의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의 누마루집으로 간살이가 세로칸은 맞걸이로,

가로칸 구들부분은 전퇴구조로 하였는데 뒤쪽으로는 헛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헛퇴를 달아 내었으며,

 평면구성은 가로칸 복판 2칸을 구들로 하여 아랫방과 윗방으로 하고 세로칸 2칸은 누마루를 두었습니다.

 

 

 

2칸의 온돌방은 서로 통할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앞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의 벽면을 글로 채워뒀슴이 눈에 들어 오고..

 

 

 

바깥쪽의 방에는 다락과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어,

마치 옛날 가정집의 구조를 보는듯 합니다.

 

 

 

방에서 나와 누마루로 올라 봅니다.

 

 

 

정자의 누마루의 천정에는 시판과 편액은 볼수 없고,

"열화정(悅話亭)"과 누마루 앞에 걸려있는 "연정(蓮亭)" 현판이 전부여서,

본래 없었거나 도난을 우려해 따로이 보관하고 있는지 없어진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열화정(悅話亭)은 자연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며 높은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기둥머리는 굴도리 아래에 장여를 받치고 소로를 끼워 수장(장여)모양의 창방을 보냈으며 중도리는 장여만 받쳤으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지지 되었으며 들보는 네모꼴로서 모를 죽인 정도이고 굽은 부재를 사용 하였습니다.

 

 

 

 

 

정자가 높은 축대 위에 지어져 누마루의 기둥이 높은 것,

누마루 앞 연못 주변에 담이 없거나 낮은 담장을 두른것 등은,

마을 앞으로 펼쳐진 득량만 푸른 바다와 남서쪽의 오봉산을 조망을 위한 것이라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숲이 우거져 옛 정취를 모두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이건창(李建昌)의 시(詩) "달밤에 못에서 (月夜於池上作 월야어지상작)"을 가져옵니다.

月好不能宿(월호불능숙) 달이 하 좋아 잠 오지 않아

出門臨小塘(출문임소당)  문을 나와 작은 연못에 이르렀네.

荷花寂已盡(하화적이진)  연꽃은 이미 다 지고 없어도

惟我能聞香(유아능문향)  나만은 연꽃 향기 맡아 볼 수 있다네.

風吹荷葉飜(풍취하엽번)  바람 불어 연잎 뒤집히자

水底一星出(수저일성출)  물 밑에서 별 하나가 나오네.

我欲手探之(아욕수탐지)  손으로 그 별 잡아 보려하니

綠波寒浸骨(녹파한침골)  물결 차가움이 뼈에까지 스미누나.

조선 말기의 문신, 학자, 대문장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철종 3)∼1898)이 보성으로 유배 왔을 때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하며,

이건창(李建昌)은 고종이 수령들을 임명하면서 잘못하면 어사 이건창이 갈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직한 성품의,

조선 최고의 암행어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열화정(悅話亭)은 단순한 정자로만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가옥으로서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두 칸의 방에서 바로 연정으로 연결을 하는 툇마루를 놓아둔 구조와,

 

 

 

아궁이방과 아궁이를 연결하는 작은 쪽문을 내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에서 바로 아궁이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점등에서 "열화정"은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자의 뒤편에서,

방을 들인 2칸은 겨울의 북풍을 막기위해 창을내지 않은 모습이고,

2칸의 마루방 뒤편의 쪽마루와 기둥이 보이고,

 

 

 

온돌의 굴뚝은 나즈막히 설치해 두었습니다.

 

 

 

정자의 지붕은 팔작이며 가로칸 앞퇴는 툇마루가 시설되었고,

구들 아래퇴에는 구들에 불을 지피기 위한 굴묵 공간이며 아랫방 뒤는 골방이며,

윗방과 누마루 뒤퇴는 누마루가 만들어 졌으며 누마루의 앞과 양측면에는 쪽마루를 내밀어서 계자각 난간을 두었습니다.

 

 

 

열화정(悅話亭)은 이 지방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활을 했다 하며,

구한말 일제에 항거해 싸웠던 이관희, 이양래, 이웅래 등 기개 높은 의인 열사를 배출한 곳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태백산맥",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에 이어,

근자에는 김용균 감독의 "불꽃처럼 나비처럼"에서는,

명성황후가 입궁하기 전 사가로 나오면서 한옥의 기품있는 건축미와 빼어난 정취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담한 일각대문과 각이 반듯한 연못,

정원에는 벚과 목련, 석류, 대나무 등이 주변의 숲과 어울려,

전통적인 우리의 조경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운치가 있으며,

노거수 동백이 주변에 있어 겨울에 더욱 아름다운 곳으로,

전남 보성의 정자 문화재 "열화정(悅話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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