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남해서부 지역을 탐방 하면서,

남해서부 지역의 서쪽 맨아랫 부분의 답사지로 진도 남도석성(南桃石城)을 찾았습니다.

참고로 전남 진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거제도에 이어 세번째로 큰 섬으로,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번창해서 옥주라고도 불렸으며,

"한 해 농사지어 삼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내려올 정도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곳입니다.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진도 남도진성(南桃鎭城)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127호로 지정 되었으며,

남도진성(南桃鎭城)에서 남도석성(南桃石城)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남도진성(南桃鎭城)은 임회면의 남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평탄한 대지 위에 돌로 축조된 성으로,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어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남도진성(南桃鎭城)의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남쪽의 정문을 두고,

관광 안내소가 있는 서쪽의 입구를 기점으로 돌아보기로 합니다.

 

 

 

안내소 옆 성벽 아래에는 여러개의 비석을 볼수있어,

조선 초기에 왜구가 해안을 자주 침범하여 해안과 섬 지방에 성을 쌓고 수군을 파견 하였는데,

이 곳의 지명이 남도포(南桃浦)였으며 만호(萬戶)가 책임자로 퍄견되었기 때문에 "남도포수군만호진성"이라 하였고,

이곳을 거쳐간 뛰어난 수군 만호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것으로 보입니다.

 

 

 

진도는 예향이면서 워낙 외진 곳이기에 유배지로도 활용되었고,

군사적 요충지라서 군사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남도석성(南桃石城)은 백제 시대 매구리현(買九里縣 : 지금의 臨准)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1270년 고려 원종(재위 1259∼1274)때 무신 배중손(裵仲孫) 장군이 강화도에서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지며,

 

 

 

삼별초군은 용장성에서 9개월간 버티다가 임금 "왕온"을 잃고,

이곳 남도석성으로 퇴각 하였는데 남도석성에서 삼별초군은 최후의 일전을 겨루었으나,

지도자  "배중손(裵仲孫) 장군"은 여기서 전사하였고 김통정은 남은 군사와 1만여 남녀를 포로로 하여 제주도로 건너 갔다고 하며,

성 남쪽 남도포는 울돌목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이곳은 군사적 요새였던 곳으로,

 

 

 

남도포진은 1438년(세종 20년)에 만호진으로 설치되었으며,

성은 1491년(성종 22년) ~ 1498년 (연산군 5년)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1759년(여지도서 출간) 이전 어느 시점엔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 하고있어,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되는 군사요충지 입니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으며,

1765년(영조 41)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터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며 둥그런 성벽과 동.서.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 있습니다.

 

 

 

남도석성(南桃石城)은 2010년 6월 22일부터 2011년 2월 14일까지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어,

내 관아터 일부를 대상으로 유구의 존재 유무와 성격 및 잔존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관아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내 6개 필지를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조사결과 확인된 유구는 배수로와 우물, 석열, 그리고 근대 가옥터 등이 있으며,

조사중 기와편(차륜문, 청해 파문, 횡선문, 집선문 등), 백자편, 옹기편, 동전(상평통보) 등이 출토 되었습니다.

 

 

 

발굴을 기초로 복원해둔 남도진성 관아의 모습으로,

본채에 앞처마를 이어내는등 건물 형태가 특이한 모양을 볼수 있습니다.

 

 

 

복원된 관아를 둘러보면,

정청과 후면에는 수장의 생활공간 등을 볼수 있으며,

 

 

 

복원 해둔지 그리 오래지 않았슴을 볼수 있습니다.

 

 

 

삼별초의 난 이후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조선시대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 하였으며,

 

 

 

기록에 의하면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조선 세종 20년)으로,

당시 성을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현재 남아있는 성은 세종 20년 이후에 쌓은 것으로 보아야 하며,

남도진성에 수군과 이를 지휘하는 종4품의 만호를 책임자로 파견하고 "남도포수군만호진성"이라 했습니다.

 

 

 

세종 재위시절에 수군의 군사조직인 "만호부"도 이곳에 있어서 이곳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으며,

 20년 전만 하더라도 성 안에 민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져 찾아볼수 없습니다.

 

 

 

관아에서 남도석성의 정문으로 보이는 문루로 가는 길에서,

여러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어 남도석성(南桃石城)은 정비가 한창인듯 합니다.

 

 

 

남도석성(南桃石城)의 남쪽 문루로 올라봅니다.

 

 

 

성의 둘레는 610m, 높이 2.8m ~ 4.1m 에 이르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하며 성문과 옹성 등도 형태가 뚜렸하게 남아 있어서, 

남도석성(南桃石城)은 "수군만호진성"으로는 그 유적이 잘 남아있어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며,

 

 

 

남쪽의 문루에 오르면 U자형 옹성으로 되어 있어 성의 방어기능과 아름다움을 같이 볼 수 있으며,

왼쪽에 있는 바다와도 아주 가까운편 입니다.

 

 

 

옹성에서 보이는 문루의 모습으로.

자료가 없슴인지 일반적으로 볼수있는 문루의 현판을 보이질 않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성이었으나 삼별초군이 개축 하였고,

이곳은 제주도에서 오는 길이기도 하지만 왜구들이 들어오는 길목이기도 했기에,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진도는 외침이 잦아,

백성들은 피난살이가 많았고 삶은 그만큼 어려웠는데,

고려말 왜구의 침공으로 백성들은 섬을 떠나 87년이 지난 후 돌아오기도 하고,

정유재란 때도 명량해전을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이곳 사람들이 목숨을 바치기도 한곳입니다.

 

 

 

남도석성(南桃石城) 앞을 흐르는 세운천은 남도진성의 해자 역할을 했다고 하며,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옛날 다리 "쌍운교(雙雲橋)"와 "단운교(單雲橋)"를 찾아 봅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단운교(單雲橋)가 세워진 시기는 1870년 이후로 보고 있으며,

 

 

 

단운교(單雲橋)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는데,

길이 4.5m, 너비 3.6m, 냇바닥에서 다리 중앙부위까지의 높이 2.7m로 작은 규모로 이 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였는데,

다리의 아치 윗부분에는 편마암질의 돌을 판석 형태로 사용하고 아랫부분에는 윗부분에 사용된 돌보다 약간 큰 강돌을 사용 하였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치 부분인데,

다듬지 않은 납작한 모양의 돌을 세로로 세워서 불규칙하게 아치형태로 돌려 쌓았습니다.

 

 

 

단운교(單雲橋)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쌍운교(雙雲橋)로 향합니다.

 

 

 

쌍운교와 단운교(雙雲橋와 單雲橋)는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 되었으며,

다리 교각이 두개와 3개의 차이로 이름을 붙인 듯하며,

 

 

 

단운교에서 약 40m 가량 떨어진 쌍운교는 개울의 너비가 단운교보다 넓어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든 점이 단운교와 다르며,

단운교와 마찬가지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로 쌓아 만들었습니다.

 쌍운교는 주민들에 의해 1930년 즈음에 세워졌다고 전하며 두개의 다리는 비록 규모는 작으나 단아한 멋이 있고,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투박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남 진도를 여행하면서 찾은 곳으로,

진도 남단의 작은 성이지만 고려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과,

조선시대 수군의 모습을 되돌아 볼수 있었던 남도석성(南桃石城)쌍운교(雙雲橋), 단운교(單雲橋) 답사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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