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을 여행하면서,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 있는,

정기룡장군(鄭起龍將軍) 유허지(遺墟址)를 찾았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정기룡장군(鄭起龍將軍) 유허지(遺墟址) 초입의 전경으로,

주차장은 정비가 잘되어 있어 주차에 어려움은 없습니다.

 

 

 

아주 약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왼쪽에는 정기룡장군(鄭起龍將軍)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1984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서있고,

 

 

 

오른쪽에는 관리사가 있고,

바로 위에 정기룡 장군의 생가를 복원해 두었습니다.

 

 

 

초가지붕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초가지붕의 본채가 들어오고,

 

 

 

본채는 정면2칸, 측면 1칸반의 크기로,

초가지붕 이지만 조선중기의 살림 규모로는 제법큰 규모이며,

 

 

 

삼문의 형식을 갖춘듯,

3칸의 대문채와 담장 그리고, 본채로 일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서 인지,

관리의 허술함 때문인지 마당에는 풀들이 있어 소홀함이 느껴지며,

 

 

 

정면에서 보아 생가의 오른편에 있는 부엌을 들여다 보고,

 

 

 

마루로 오르는 디딤은 보통 돌을 놓아서 사용함을 보아 왔는데,

나무로 둔 디딤목은 흔치 않아서 검소함의 표현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본채는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이 있어서,

왼쪽의 방은 부엌이 있으니 안방이며 오른쪽은 사랑방이나 건너방으로 여겨 집니다.

 

 

 

생가는 모두 개방이 되어 있어 안방부터 들어가 봅니다.

 

 

 

정기룡장군의 탄생(誕生)에는 하동문화원에서 발행한 "하동의 구전설화"에 실려있는 이야기가 있어,

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죽게 되었는데,

가족이 염을 하던 중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고, 

그러던 중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더니 사흘 후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정기룡이었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한 것이라 믿었다고 전합니다.

 

 

 

"하동의 구전설화"의 또다른 "명마" 이야기로,

정기룡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감 하였으며 진주성 전투에서 부인 강씨를 잃었으나 슬픈 중에도 용감히 싸웠다고 하며,

이후 다시 권씨 부인과 혼인하게 되는데,  권씨 부인 또한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혼인전 그녀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자와도 혼인할 뜻이 없다고 하여 어느새 노처녀가 되었는데,

그러다 정기룡 장군을 만나게 되자 그와 혼인하겠다고 마음을 정 하였고 장군은 당시 전란 중 이었다는 점과 그의 옛 부인을 떠올리며 고민했지만,

결국 그녀와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씨 부인은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날쌔고 힘이 세어 정기룡 장군이 타고 다녔다고 하며,

이 말이 장군이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상주에도 정기룡장군 유적지가 있어 충의사(忠毅祠)가 있으며,

상주의 명승 경천대(驚天臺)에는 정기룡 장군 동상과 명마 동상을 볼수 있어, 

경천대(驚天臺) 용소에서 솟아나와 뛰어놀던 용마를 장군의 재치로 용마를 얻었다는 또하나의 전설도 전합니다.

 

 

 

마당 한쪽에는 쓰레기 소각을 위한것으로 보여져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시골 이라고 하나 바로옆에 야산이 있고 하물며 유적지의 마당에 자리하고 있슴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생가의 뒷뜰에도 풀이 수북히 자라 있으며,

초가담장 너머로 경충사(景忠祠)가 들어 옵니다.

 

 

 

11월 중순을 넘기고 있슴에도,

노랗게 물든 노거수 은행나무가 인상적인 경충사(景忠祠)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경충사(景忠祠)의 솟을삼문으로 외삼문이며,

 

 

 

외삼문의 진령문(鎭嶺門) 현판 이며,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재실이 있고 가운데 내삼문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기념관이 자리해 있습니다.

 

 

 

1988년에 건립한 기념관(記念館)으로,

 

 

 

기념관(記念館)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6호 "정기룡장군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나,

문이 닫혀있어 볼수는 없습니다.

 

 

 

제사를 준비하는 제실(齋室)로 보이는 "경충당(景忠堂)"으로,

 

 

 

경충당(景忠堂)"의 현판 입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노랗게 물들어 있는 은행나무의 늠름한 자태에 눈길이 머물고..

 

 

 

내삼문을 통하여 사당인 경충사(景忠祠)로 들어갑니다.

 

 

 

구국공신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인 경충사(景忠祠)로1932년에 건립 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사당이 철거되고 유품이 압수되는 등의 고난을 겪는 과정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 왔으며,

1968년과 1970년에 걸쳐 보수와 정비를 하였습니다.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은 선조 임금 때의 무장으로 호는 매헌(梅軒), 본관은 진양이며,

1562년(명종 17)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에서 출생하며 20세인 1581년 상주로 옮겼으며,

1586년(선조 19) 무과에 급제한 후 선조 임금의 명에 따라 이름을 정무수(鄭茂壽)에서 정기룡(鄭起龍)으로 바꾸었습니다.

1591년에 훈련원 봉사에 임명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여 거창전투에서 승전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며,

그해 10월 김산(현재의 김천)싸움에서는 포로가 된 경상방어사 조경 장군을 구출했으며, 그 공로로 상주 가판관으로 승진 하였고,

11월에는 일본군이 점거하고 있던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을 구사하여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1월말에는 화북면 용화동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고, 12월에는 함창 창의군과 연합전선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격퇴 하였고

1593년에 전공을 인정받아 회령부사가 되었으며, 1594년에 상주목사가 되고, 그 후에 통정대부에 올랐습니다.

 

 

 

1597년 8월 7일 정유재란 때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경상북도 고령에서 일본군을 대파 하는등 여러 전투에서 승전을 거두었고,

1598년에는 명나라군대의 총병관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잔병들을 소탕 하였으며,

1617년(광해 9) 삼도 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고,

1621년에는 삼도 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재임명되어 재직하다가 61세를 일기로 병사 하였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환란에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이순신, 권율, 김시민,사명당, 곽재우 등을 기억하지만,

"바다에는 충무공 이순신, 육지에는 충의공 정기룡”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연전 연승 무패의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였고 직급등의 연유로 높게 평가받지 못하여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하였으나,

국난극복에 큰힘이 되었던  정기룡 장군의 충심과 유허를 살필수 있는곳으로,

경남 하동의 하동 정기룡장군(鄭起龍將軍) 유허지(遺墟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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