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아산을 여행하면서,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일대에 있는 사당 "현충사(顯忠祠)"를 다녀 왔습니다.

 

현충사(顯忠祠)는 하나의 사당(祠堂) 이라기 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유허(遺墟)가 있는 일대로 사적 제15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별칭으로 "아산(牙山) 이충무공 유허(李忠武公遺虛)" 라고도 불리지만 우리에게는 현충사(顯忠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입구에는 자연석의 커다란 비석이 있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의 글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1597년 불과 13척의 낡은 전함으로 왜군을 맞아 명량대첩(鳴梁大捷)을 맞이하는,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함으로써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조선 수군은 왜군의 서해안 진출을 틀어막음으로써 전쟁의 일대 전환점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아산의 현충사(顯忠祠)에는 휴일을 맞아 많은 이들이 찾은 모습이고,

 

 

 

입구 가까이 있는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은 2011년에 건립된 곳으로,

 

 

 

전시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영정을 마주하게 되며,

(影幀)은 1953년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것으로 표준 영정으로 지정 되었다고 합니다.

 

 

 

전시관 에서도 많은 이들을 만날수 있어,

이 충무공(李 忠武公)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는듯 하고,

유물관에는 국보 제76호로 지정된 난중일기 亂中日記), (서간첩 書簡帖), (임진장초 壬辰狀草)외,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장검(長劒)·옥로·요대·도배구대(桃盃俱臺)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에 전시된 것은 대부분 모조품이고 진품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충렬사(忠烈祠)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23전 23승의 연승신화를 이루어낸,

 

 

 

충무공(忠武公)과 휘하의 조선수군과 왜의 수군과의 해전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해 두었고,

 

 

 

당시의 전함들을 모형으로 두었는데 조선의 군선(軍船)인 "판옥선(板屋船)"의 모습으로,

조선 전기의 군선은 조운(漕運)을 겸하는 맹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군용으로서 제 구실을 못하였으나,

1555년(명종 10) 군선을 새로 개발한 판옥선은 구조와 기능이 혁신적으로 변모한 전투함으로,

종래의 군선에 비해 선체가 커서 노군의 수를 늘릴 수 있어 기동성이 좋아졌고,

선체(船體)의 상면(上面)에 상장(上粧)을 가설하여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노군과 군사들이 방해하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완승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해전, 부산해전 등 주요 해전에 동원된 군선 중에서 3척의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옥선 였으며,

당시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 길이 50~55척, 탑승인원 130명 정도로 파격적으로 컸으며,

사실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일본에 비해 수군이 강하다는 것을 한번도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순신 장군의 용병술과 판옥선을 통해 판옥선의 탁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주력 군선 아다케부네(安宅型船)로,

임진왜란 시기의 일본 수군은 정식 수군이라기 보다는 왜구가 정규병으로 편입된 경우가 다반사 였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해전술은 배에 대형화포를 탑재하지 않은 해전으로,

전투개념은 소위 말하는 "등박육전술(登船肉薄戰述)"로 상대방의 배 안에 난입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로,

배가 커야할 필요가 없었으며 이는 화기가 일반화 되기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해전의 기본 전술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조선 수군은 고려 말 화포의 자체 생산 이후 배에 화포와 궁시류를 탑재한 원거리 전투가 기본 전술로 정착 되었으며,

일본은 이순신 장군에게 연패를 당하자 수전 자체를 포기하고 쓰시마와 부산 사이의 보급로 확보에만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강화회담 및 휴전시기에 일본은 대형 아다케부네(安宅型船) 생산에 주력하는 한편 새로운 해전술 개발에 중점을 둔 점에서 추정할 수 있으며,

정유재란시 원균(元均)의 함대를 맞아 야간 기습과 더불어 물량 공세에 의한 일대 다수 포위전술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데 성공 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돌격선인 "거북선(귀선,龜船)으로,

선체높이 6~6.5m, 선체길이 26~28m, 선체너비 9~10m로 정식 명칭은 "귀선(龜船)"이며,

격군(格軍)과 사수를 합쳐 125명이 승선했으며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板屋船)의 상체 부분을 개량해서 덮개를 덮은 구조로,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으며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어 있어,

왜군의 배 안에 난입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인 "등박육전술(登船肉薄戰述)"을 감히 펼칠수 없게 되어 있으며,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화포(礟穴)로 활용하였으며,

거북선의 대포 구멍(礟穴)은 배 양쪽의 22개, 앞쪽 거북머리의 위 아래 4개, 배 위의 거북등에 12개가 설치 되어 있어,

전방위 포격이 가능하도록 구상 했음을 알수 있으며 난중일기의 기록에 보면 적의 규모가 크면 먼저 거북선을 돌격시킨 것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전시관에는 보물 제326호로 197cm 에 달하는 이순신 장군의 장도(長刀)를 볼수 있어,

두 손으로 잡고 사용하는 칼 장도(長刀)는 쌍수도로 짐작되며,

임진왜란 전쟁 중인 1594년(선조27) 태귀련(太貴連)과 이무생(李茂生)이 제작 하였으며,

2m에 가까운 칼의 길이로 인해 실제로 쓰이는 칼인가 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조선의 도검인 "쌍수도(雙手刀)"에 해당하는 칼이며,

중국의 무비지나 기효신서의 장도에 해당하는 칼로 원래 길이가 2m 정도 되는 칼이며,

이순신 장군이 키가 커서 그렇게 큰 칼을 쓴 것은 아니며 쌍수도(雙手刀)의 도법에 쓰는 칼임을 알수 있습니다.

 

 

 

2자루의 장도(長刀)에는 검명이 새겨져 있어,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강산이 떨고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전시관을 나와 현충사(顯忠祠)의 외삼문에 대당하는 솟을대문으로 들어갑니다.

 

 

 

보물 제1288호 "타루비(墮淚碑)"는 이순신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이곳의 비석은 북제품이며 진품은 여수 진남관 맞은편 고소대에 자리해 있으며,

"타루(墮淚)"란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로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성어에서 인용 하였으며 비의 형태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고 받침돌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직하게 솟아 있습니다.

비문은 ‘타루비’라는 비의 명칭을 앞면에 크게 새기고 그 아래로 명칭을 붙이게 된 연유와 비를 세운 시기 등을 적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 비를 세웠습니다.

 

 

 

늦가을의 휴일을 맞아 많은 이들이 아산 현충사(顯忠祠)를 찾은 모습이며,

 

 

 

너른 잔디광장에는 가족, 친지들과 저물어가는 가을을 즐기는 모습 입니다.

 

 

 

서리가 내리면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모과나무에 달려있는 모과가 탐스럽습니다.

 

 

 

생가와 사당, 구 사당과 입구의 갈림길 역활을 하는곳에서 만나게 되는 멋들어진 모습의 소나무로,

소나무의 위용과 자태에 많은 이들의 발길을 붙들어 두고 있으며,

 

 

 

참배의 공간으로서의 현충사(顯忠祠) 방문 뿐만 아니라,

 

 

 

단풍이 있는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윽고 고택을 만나게 되고,

고택을 지나 무예장과 "이면"의 묘소를 먼저 둘러 봅니다.

 

 

 

고택 옆에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청년 이순신(李舜臣)이 활을 쏘며 무예를 닦던 곳 입니다.

 

 

 

무예를 단련했던곳 윗쪽의 언덕에는 묘소가 있어,

 

 

 

이순신의 셋째아들 "이면(李葂,1577~ 1597)"의 묘소로,

21세의 이면(李葂)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정유재란의 명량대첩 후 이순신에 대한 보복으로 고향 아산현에 습격한 일본군에 항쟁하다 전사 하였는데,

영리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하며 부친인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이면(李葂)의 죽음 소식을 듣고 목 놓아 통곡(痛哭)했다고 하며,

이순신은 자신을 많이 닮은 이면(李葂) 가장 아꼈다고 합니다.

 

 

 

묘역에는 3대 종손 이광윤(李光胤), 4대 종손 이홍의(李弘毅), 10대 종손 이규남(李奎南) 부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으며,

 

 

 

묘역을 내려와 지나왔던 고택으로 되돌아 옵니다.

충무공(忠武公) 고택(古宅)은 3월말에서 4월초에 만개하는 "홍매화"가 이름나 있으며,

 

 

 


이순신 장군은 1545년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이사 하였고,

결혼후 32세에 무과급제 하기 전까지 무예를 익히며 살던 곳으로,

 

 

 

고택(古宅)은 원래는 충무공의 부인이 살던 집이었는데,

충무공(忠武公)이 당시 보성군수(郡守)의 딸 상주(尙州) 방씨(方氏)와 혼인해 데릴사위로 오게 되면서 사실상 충무공의 집으로 바뀌었고,

이후 종손이 대대로 살아오다가 몇 차례 중수 또는 개수 되었으며 현충사로 이전되어 보존 가옥으로 전시 하고 있습니다.

 

 

 

고택(古宅)을 살펴보면 조선중기의 양식은 거의 퇴색되어 찾아 보기 힘드는데,

여러 차례의 중수 또는 개수를 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와 말기의 양식으로 변한듯 하며,

 

 

 

마치 복원해 둔것처럼 느껴지며 고택(古宅)의 분위기를 찾기 힘듭니다.

 

 

 

충무공(忠武公) 고택(古宅)은,

2009년 정부의 허술한 사적지 관리와 충무공 15대 후손 종부(宗婦)의 세심하지 못한 재산관리로,

법원 경매에 넘어가 세상을 떠들썩 하게 했으며 개인에게 매각될뻔 했지만 "덕수 이씨 풍암공파 문중"이 나서서 겨우 막았다고 합니다.

경매에는 고택 부지 2만 2천 6백여평과 문화재 보호구역 내 임야와 농지 등 2만 9천 6백평이상의 토지로,

부지내에는 고택을 포함해 이 충무공의 아들인 이면(李葂)의 묘와 장인, 장모 묘소가 포함돼 있었으며,

 

 

 

경매에서 낙찰받은 "덕수 이씨 풍암공파"는 이순신 장군의 직계 후손인 덕수 이씨 충무공파의 상위 종파이며,

이후 종회에서 재산을 관리하며 국민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문중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안채의 뒷마당에서 장독과 우물을 돌아 보는것으로 고택(古宅)에서 나옵니다.

 

 

 

고택(古宅)에서 나와 사당인 현충사(顯忠祠)로 가는 길목에는,

산수유가 만추의 계절임을 알리는듯 하고,

 

 

 

저물어 가는 가을 단풍도 곳곳에서 볼수 있습니다.

 

 

 

현충사(顯忠祠)로 들어가는 솟을 삼문인 충의문(忠義門)으로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현충사는 1704년(숙종 30) 아산의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사당건립을 상소함에 따라,

1706년에 건립했으며 그 이듬해 '현충사(顯忠祠)로 사액(賜額) 되었습니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일제강점기로 인해 황폐화되었다가,

1932년 6월 이충무공 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성금을 모아 중건하여 영정을 봉안 했으며,

1962년 3월 충청남도에서 경내를 확장하고, 유물전시관을 신축 했으며..

 

 

 

1967년 3월에 현충사를 사적 제155호로 지정하여 사당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이때 보호구역의 면적은 10만 6,577평 였으며,

그후 1973년 5월 현충사 사적보호구역을 21만 6,137평으로 확장 지정했으며,

1974년 4월 42만 4,880평으로 다시 확장하여 경역면적은 현재 16만 3,096평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충사" 현판으로 1967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로,

한때 이곳의 현판의 거취로 찬,반 양론이 뜨겁게 일기도 했으나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합니다.

 

 

 

누란지세의 조선을 구한 이순신(李舜臣) 1545년(인종 1)~ 1598년(선조 31) 장군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무관으로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후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등 군사를 조련했으며,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 하기도 하였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에서 적선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 시켰으나,

1595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구명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 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여 원균이 이끄는 조선함대가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수군의 기습을 받아 참패 하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복귀했고,

1597년 진도 울돌목(鳴梁)에서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할수 있었습니다.

1598년(선조 31) 11월 임진왜란 최후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200여 척의 일본수군을 격파하였고 포위되었던 명의 장수인  진린(陳璘)을 구하고,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아 전사 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 쓴 7년간의 진중일기인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전하고 있으며,

1643년(인조 21년)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되었습니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은 이곳 현충사 외에도,

전국의 여러 곳에 위치해 있는데 전라 좌수영이 있던 전남 여수시의 충민사와 통제영이 있던 경남 통영 한산도의 충무사가 있으며,

남해안의 진도와 남해, 고성, 고금도 등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 입니다.

 

 

 

숲길을 조금 걸어 현충사(顯忠祠)의 옛사당인 구(舊)본전을 찾아 봅니다.

 

 

 

구(舊) 현충사인 구(舊)본전은 1706년에 건립 하였으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지금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 세웠다고 하며,

 

 

 

현충사(顯忠祠) 현판으로, 1707년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이 사액(賜額)한 숙종의 어필 현판 입니다.

 

 

 

구(舊)본전 내부는 비워져 있으며,

지금의 사당으로 옮겨 졌거나, 크게 지은 현충사(顯忠祠) 사당이 있어서 비운듯 하며,

 

 

 

구(舊)본전의 주련(柱聯)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2~ ?)의 글로,

一誓海山立綱常於百代 (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사람이 지켜야 할 근본)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 (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    천지를 구해냈어되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成仁取義精忠光於檀聖 (성인취의정충광의단성)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補天浴日功德盖於槿邦 (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모두 아홉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충무공(忠武公) 하면 오직 이순신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 졌고 많은 전적지와 유적이 있지만,

아산 현충사(顯忠祠)에서 다시금 살펴보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의 유허(遺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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