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광양을 여행하면서,

섬진강변의 정자 광양의 "수월정(水月亭)"을 찾았습니다.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정자 수월정(水月亭)이며,

 

 

 

섬진(蟾津)나루 변에 있는 수월정(水月亭)이 있는 곳에는,

 

 

 

두꺼비와 관려한 아담한 소공원이 있으며,

섬진강의 이름을 만든 두꺼비와 처녀의 인연에 대한 전설을 표현해 두고 있어,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옛날 두치강(豆恥江) 하류의 두치진(豆恥津) 나루터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마음씨 착한 처녀가 있었는데,

이 아가씨가 어느 날 저녁밥을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두꺼비 한 마리가 부엌으로 들어와서 큰 눈자위를 껌벅이며 쳐다 보았다.

처녀는 외롭게 쳐다보는 두꺼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두꺼비한테 밥을 주고 두꺼비가 잠을 잘 집을 지어 함께 살았다.

이 두꺼비가 처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산 지 벌써 3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

섬진강 상류에 홍수가 나서 온 동네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처녀가 잠을 깨어 둘러보니 사람과 가축은 물론이고 집까지 노도와 같은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고,

이때 처녀도 둥둥 떠내려가며 '사람살려'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때, 그 동안 자기가 기른 솥두껑만한 큰 두꺼비가 나타나 서둘러 달려왔다.

허우적거리는 처녀 앞에 등을 내밀었고, 처녀는 두꺼비 등에 타 강기슭을 향해 함께 헤엄쳤다.

강기슭에 도착하자 두꺼비는 그만 죽고 말았다.

처녀는 강기슭 동산에 두꺼비를 장사(葬事)를 지내고 매년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하며, 

마을사람들은 그 처녀가 두꺼비를 타고 도착 한 곳을, 두꺼비나루라는 뜻으로 섬진(蟾津)이라 부르고, 강은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소공원에는 섬진강에 대한 유래을 적어 두었으며,

 

 

 

섬진강의 두꺼비와 관련한 또하나의 이야기로,

고려 32대 우왕(禑王) 11년(1385) 경에 왜구가 바다를 건너와 섬진강으로 배를 타고 들어온다는 소식에,

이곳 마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는데 왜적의 병선이 이 섬진강 하구에 도착하자,

갑자기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새까맣게 떼로 몰려와 울부짖는 바람에,

왜군들은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끼쳐 감히 상륙조차 못하고 달아나 버리게 되었는데,

왜군들이 후퇴를 하자 두꺼비들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전하며,

그 뒤로부터 두치강(豆恥江)이라 부르던 이 강을 두꺼비 "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수월정(水月亭)과 소공원이 있는 이곳 다압면(多鴨面) 도사리(道士里)는,

"광양 매화마을"로 유명한 곳으로 해마다 3월이면 화사하게 피어난 매화를 즐기러 많은 이들이 찾는곳 이기도 합니다.

 

 

 

다시 수월정(水月亭)으로 되돌아 옵니다.

정자 옆에는 1971년 정설의 후손들이 수월정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수월정 유허비(水月亭遺墟碑)"가 있어,

원래의 수월정 유허비(水月亭遺墟碑)는 정설(鄭渫)이 부친인 정옥천의 유업을 추모하기 위해,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碑)란 비명을 받아 비를 세웠는데 정옥천유허비라고도 합니다.

 

 

 

수월정 유허비 반대쪽에는 "섬진진지 석비좌대(蟾津鎭址石碑座臺)"가 있어,

석비좌대들은..섬진진을 거쳐간 별장들의 송덕비나 불망비 같은 비석을 받친 좌대로 여겨지며,

현재 4기가 수월정 옆에 자리해 있으며 대부분의 비석 받침돌이 거북모양 인데 반하여 이곳의 받침돌은 두꺼비모양이라는 것이 특이하며,

 

 

 

좌대는 석조 두꺼비상으로 치아가 빠진 입모양, 간략한 발모습, 독특한 머리와 눈모양 등 투박한 조선시대 조각기법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데,

수월정이 있는 이곳은 섬진강 일대를 통제하는 수군진지인 섬진진(蟾津鎭)이  있었다고 하는곳으로,

 

 

 

임진왜란시(1592~1598)에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곳 섬진진(蟾津鎭)을 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첩보기지로 활용하면서 수시 보고를 받고,

직접 이곳에 와서 전황을 살핀 사실이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월정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이곳에서 매복 작전을 폈고,

1895년까지 수군 장교인 별장이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지켰곳 이기도 하며,

이곳에는 별장들의 공적비를 세운 받침돌이 남아있는데 특이한 것은 섬진강 이름 유래에 걸맞게 두꺼비 석상을 좌대로 두었습니다.

 

 

 

수월정(水月亭)은 조선 선조(宣祖)때 광주목사(光州牧使) 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충청감사를 끝으로 퇴임한 정설(鄭渫)이 51세에 말년을 보내기 위해 선대(父)께서 생활하고 있던 섬진강변에 정착하면서,

1573년 수월정을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의 정자는1999년 광양시가 복원한 것 입니다.

 

 

 

정자는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이고 모임지붕의 홑처마 구조이며,

주변 지형과 바람의 영향을 고려하여 높은 지붕위에 소와(小瓦)를 깔고 용마루 중앙에 찰주(擦柱)를 설치하고 화강석으로 마감 했으며,

구조적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우아하고 단아한 건축미를 볼 수 있습니다.

 

 

 

수월정(水月亭)의 현판 이며,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섬진진지 석비좌대(蟾津鎭址石碑座臺)" 이며,

 

 

 

수월정(水月亭) 에서는 섬진강(蟾津江)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수월정(水月亭)에서의 아름다움에 반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지어 칭송하여 노래했고,

 

 

 

드라마로 방영되어 널리 알려졌으며,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해서 "간양록(看羊錄)"을 남긴,

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운(睡隱) 강항(姜沆,1567-1618)은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을 지어,

수월정의 주변에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고 하였는데,

병란 후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水月"과 같은 담백한 삶을 사는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섬진강의 유래를 찾을수 있고,

섬진진지(蟾津鎭址)와 정설(鄭渫)의 유허가 있는곳 으로,

매화가 한창인 3월에 찾으면 더욱 좋을곳으로 섬진(蟾津)나루의 정자,

전남 광양의 "수월정(水月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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