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을 여행하면서,

조문국 박물관에 이어 인근에 있는 "금성산 고분군"과 "조문국(召文國) 경덕왕릉(敬德王陵)"을 찾았습니다.

 

조문국 박물관에서 보이는 "의성 금성산 고분군"의 일부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성 금성산 고분군(義城 金城山 古墳群)은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탑리리·대리리·학미리 일대에 있는 고분 유적이며,

경덕왕릉(敬德王陵)은 금성면 대리리(大里里) 고분군에 속해 있으며,

 

 

 

주차장을 나오면 입구에는 커다란 시비가 있어,

만사(晩沙) 김진종(金振鍾,1883~1951)이 경덕왕릉의 비를 세우며 읊은

"차조문경덕왕릉수비운(次召文景德王陵竪碑韻)"로, 

召文往跡杳千秋(조문왕적묘천추)   조문국의 지난 자취 천추에 아득하고

曠感興懷涕欲流(광감흥회체욕류)   공허한 감흥에 일어나는 회한에 눈물 흘리네

世遠嗟無徵國史(세원차무징국사)   차홉다 세대가 멀어 역사를 찾을 수 없으나

禋精應有格靈休(인정응유격령휴)   정성드려 제사모시니 혼령은 알지로다

杉松增彩新趺座(삼송증채신부좌)   삼나무와 소나무 빛이 새로운데

葵麥堪憐舊殿樓(규맥감련구전루)   가련하다 옛날의 궁전들 빈터만 남았으나

敬肅餘芬猶未泯(경숙여분유미민)   경건하게 향불 올림은 아직도 여전하니

行人咸式古城頭(행인함식고성두)   길손들은 너 나 없이 옛 성터라 말하네

 

 

 

안쪽에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조문국(召文國) 무인상(武人像)"이 있어,

고분의 출토 유적을 고증으로 세워둔듯 합니다.

 

 

 

금성산 고분군(金城山 古墳群)은 삼한 시대에 부족국가인 조문국의 것으로 여겨지며,

조문국은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였던 나라로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도읍지로 하여 존속하다가,

185년(신라 벌휴왕 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하며,

서기 185년(신라 벌휴왕 2년)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21대왕 369년을 존속했던 경북지역 최대 부족국가로,

삼한시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독자적 정치체계를 갖춘 "국(國)"의 존재로 기록되고 있는 국가이며,

의성지역을 중심으로 상주, 문경, 단양, 울진, 영덕까지 세력을 넓히며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던 나라 입니다.

 

 

 

고분군으로 들어 가기전,

조문정 전망대에 오르면 시원하게 트인 고분군의 전경도 좋으며,

 

 

 

고분군(古墳群)을 돌아보면 필요한 곳에 안내표지와 안내문이 있어 이해가 편합니다.

 

 

 

옛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릉(景德王陵)으로,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古墳)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碑石)과 상석(床石) 등이 있으며,

능(陵)의 둘레가 74m이며 능의 전면(前面)에는 가로42cm, 세로 22cm,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으며,

 

 

 

경덕왕릉(景德王陵)이 발견 되기에는 신기한 전설이 있어,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조선 후기의 문신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시문집인 허미수 문집(許眉叟 文集)에 실려 있어,

먼 옛날에 한 농부가 외밭(瓜田)을 마련하기 위하여 작은 언덕을 갈던 도중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큼직한 구멍이 나타나,

이상하게 생각되어 들어가 보니 돌로 쌓은 석실(石室)이 있어 석실의 둘레에는 금칠을 하였고 가운데는 금소상(金塑像)이 있는데,

그 머리에 쓴 금관(金冠)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농부는 욕심이 나서 금관을 벗기려 하였더니 그만 농부의 손이 금관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날 밤 의성군수(義城郡守)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나는 경덕왕(景德王)이다.

아무 곳 아무 데 와서 살펴보고 이 무덤을 개수 봉안토록 하여라” 고 현몽하였으므로,

이튿날 곧 이곳을 발견하여 봉을 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 지방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도 전해 오는데,

현재의 능지(陵地)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吳克謙)의 외밭(瓜田)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내가 신라시대(新羅時代) 조문국(召文國)의 경덕왕(景德王)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陵) 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 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으며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縣令)께 고(告)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祭禮) 행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덕왕릉(景德王陵) 옆에는 고분의 형태를 살린 전시관이 있어,

 

 

 

대리리(大里里) 2호분의 고분 전시관으로,

 

 

 

2009년 5월부터 2010년 9월 30일까지 발굴한 대리리 2호분의 내부 모습을 재현한 전시관으로,

대리리 2호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 순장 문화를 통해 당시의 매장 풍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족 합장묘인 대리리 2호분 1차봉토의 주피장자의 인골(복제)이며,

대리리(大里里) 2호분은 5세기 중반~후반에 축조된 봉토분이며 양장분(兩葬墳)으로 증축분이며,

봉토의 규모는 직경 28m, 높이 7m정도이며 봉토 내에서 매장주체부를 제외하고 8기의 무덤이 조성되었으며,

봉토 주변에서 목곽묘, 적석목곽분 2기의 무덤이 확인 되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분 1차봉토의 부곽 출토 인골(복제)로,

이무덤에서 금동제품과 순장의 존재로 보아 무덤 주인은 지배층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매장주체부의 주곽 구조는 경주지역 지배층의 묘제인 돌무지덧널무덤인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토기는 대부분 의성양식토기(재지계)로 구성되고 있어 독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분은 2개의 봉토로 이뤄진 것으로,

뒤에 축조된 무덤은 앞서 축조된 봉토의 한쪽 부분을 굴착하고 축조한 뒤 크게 성토하여 하나의 무덤을 이뤘으며,

봉토의 규모는 직경 30m, 높이 8m 정도로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3기, 목곽묘(木槨墓) 3기를 확인했고,

뒤에 축조된 봉토에서는 적석목곽묘 1기가 확인 되었습니다.

 

 

 

선축된 봉토의 매장주체부는 피장자가 묻힌 주곽과 유물을 매납하는 부곽이 평면 ‘11자형’으로 축조됐으며,

주곽은 적석목곽묘, 부곽은 목곽묘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2호분에서 현재까지 100여점의 토기류와 금동제 행엽, 운주, 재갈, 철모 등의 유물이 출토 되었습니다.

 

 

 

대리리(大里里) 2호분 출토 유물을 전시 해두어,

그중 하나로 허리띠 장식인 "과대금구(銙帶金句)" 이며,

 

 

 

전시관에는 대리리(大里里) 2호분의 당시의 매장풍습에 대해 배워볼 수 있는 봉토 축조과정을 디오라마로 표현해 두어서,

 

 

 

봉토의 축조과정을 알기 쉽게 해 두었고,

 

 

 

고대국가 였던 당시에 고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 되었으며 정성과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무덤의 구조가 신라 마립간 시기 왕족의 무덤인 적석목관분(積石木槨墳)과 아주 흡사한 구조이며,

금동제품과 순장의 존재로 보아 무덤 주인은 지배층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매장주체부의 주곽 구조는 경주지역 지배층의 묘제인 적석목곽묘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토기는 대부분 의성양식토기(재지계)로 구성되고 있어 독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2년 (185)조에는,

“파진찬(波珍飡) 구도(仇道)와 일길찬(一吉飡) 구수혜(仇須兮)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공벌(攻伐)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문소군(聞韶郡)은 본래 소문국(召文國)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고,

지금의 의성부(義城府)이니 소속 현은 네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도 의성에는 소문국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읍지(邑誌)"에는 소문국의 옛 터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라 전하고 있습니다.

 

 

 

금성산 고분군은 삼한 시대에 부족국가인 조문국(召文國)의 것으로 여겨지며,

조문국은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였던 나라로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도읍지로 하는 경북지역 최대 부족국가로 존속하다가,

185년(신라 벌휴왕 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하며 조문국이 위치했던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 였으므로 이곳을 장악한 신라는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의성지역을 중심으로 상주, 문경, 단양, 울진, 영덕까지 세력을 넓히며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던 고대국가 였으나,

더이상의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되어 사라져 버렸으며,

고분군(古墳群)만 남아 조문국(召文國)의 옛 역사를 전하는,

경북 의성의 금성산 고분군과 경덕왕릉(敬德王陵) 방문기 입니다.

 

인근에 있는 조문국(召文國) 박물관은 이곳에 별도로 남깁니다.

의성 조문국 박물관_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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