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 왕대마을의 모후산(918m)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도의 깊은 산속에 있는 순천의 별서 초연정 원림(超然亭 園林)을 찾았습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된 초연정(超然亭)은,

정자와 주변의 외원(外苑)을 포함하는 원림(園林)으로 대한민국의 명승 제25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초연정(超然亭)으로 들어 가면서,

초연정 내원도(김영환,2014작)로 초연정 원림(超然亭 園林)을 먼저 살펴 봅니다.

 

 

 

왕대마을을 지나 차량으로 산비탈을 오르면 주차공간이 나오고,

겨울 숲속길을 따라 초연정(超然亭)으로 들어 갑니다.

 

 

 

잠시 숲길을 걸으면,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암반 위에 축대를 쌓고 그위에 자리잡은 초연정(超然亭)이 들어 오고,

 

 

 

정자로 오르기전 왕대사적을 먼저 보기위해 냇가로 향합니다.

 

 

 

이곳 모후산은 고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자비령을 넘어 쳐들어 오자,

왕과 왕비는 태후를 모시고 안동, 순천을 거쳐 이곳 산기슭까지 피난왔다고 하는데,

수려한 산세에 반한 왕이 모후산에 가궁을 짓고 환궁할때까지 해를 넘겨 1년여 남짓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산의 이름을 나복산에서 어머니의 품속같은 산이라 하여 모후산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그 근거는 미미하다고 하며,

 

 

 

왕대사적은 계곡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만날수 있으며,

 

 

 

초연정(超然亭) 외원에 해당하는 계곡은,

겨울을 앞두고 있어 수량이 많지 않은편 입니다.

 

 

 

왕대사적을 찾아 오르며 바위에 새겨진 글들을 볼수 있으나 위치를 알수 없었는데,

 

 

 

마침 안내문있어 왕대사적(王垈事蹟)기문과 침류대(枕流臺)를 찾을수 있는데,

침류(枕流)란 "돌을 베고 잠을 잔다"는 뜻으로 물가에서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이며,

 

 

 

왕대사적(王垈事蹟)은 고려 공민왕인 피신해 살았다는 왕대마을의 유래와 연혁을 다루고 있으며,

옥천조씨의 입향조와 그 후손들이 그 뜻을 기려 각석을 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암각된 글씨는 바위의 이끼등으로 인해 알아보기 쉽지 않으며,

초연정(超然亭)으로 오르는 길을 잡습니다.

 

 

 

초연정(超然亭)은 원래 1788년(정조 12) 대광사(大光寺)의 승려가 창건하여 수석정(水石亭)이라 이름 짓고 수도하던곳 였으나,

1809년(순조 9)에 청류헌(廳流軒) 조진충(趙鎭忠,1777∼1837)이 중창하여 순창조씨의 제각으로 사용했으며,

처음에는 건물이 초가였으나 그의 아들 조재호(趙在浩)가 기와지붕으로 중건하였고,

1888년(고종 25)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이 초연정(超然亭)이라 명명 하였습니다.

그 후 1896년과 1925년에 중수하였고 6.25로 폐사(廢舍)된 것을 1986년에 복원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정자 옆에는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고려 공민왕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 일행이 이곳 모후산에 머물렀다 하여 유경(留京)이라 부르다가,

마을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다시 피신했다고 해서 왕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초연정의 바위에는 공민왕이 파천했던 당시 왕을 호위하던 5명의 장수가 깃대를 꽂았던 흔적이 있다고 하여 "깃대바위" 라고도 부릅니다.

 

 

 

초연정(超然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앞뒤에 툇마루가 있는 단층에 홑처마 팔작지붕의 정자로,

높은 암반 위에 축대를 1단 쌓고 건물을 앉혔으며 정면은 좌우 칸을 크게 하고 중앙 칸을 적게 하였으며,

측면은 중앙 칸의 앞과 뒤에 퇴를 두었으며 칸의 구성은 좌측 1칸은 마루로 하였고 나머지 1칸 반 정도를 방으로 하였으며,

그 우측의 반 칸을 부엌으로 하였습니다.

 

 

 

정자 앞에 이르니 이곳 바위에도 글씨가 있어,

 

 

초연정(超然亭)이전 다른 명칭으로 사용한듯 보이며,

 

 

 

초연정(超然亭)으로 오르기전 현판을 찾아 보았으나 어디에도 없으며,

 

 

 

초연정(超然亭)은 정자의 명칭이 없었던 것을,

조준섭(趙俊燮)이 고종 25년(1888년)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 우국지사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1836~1905이,

1888년 제자 40여 명과 시회를 열고 "초연정(超然亭)"이라고 정자명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창녕(昌寧) 조병기(曺秉琪)가 쓴 "경차초연정운(敬次超然亭韻)"의 편액이 있으며,

 

 

 

6대손의 편액으로 초연정(超然亭)에서는 단 2개의 판상만 찾을수 있는데,

초연정 원림에 관련되어 알려져 있는 시문은 총 35편으로 송병선이 직접 쓴 편액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후섭(趙後燮), 조인섭(趙仁燮) 기문, 아천석(我泉石)이라고 쓴 현판도 있었으나 모두 행방을 찾을수 없어 아쉽습니다.

 

 

 

2칸에 가까운 온돌방은 제법 너른편이며,

 

 

 

비교적 밝은편이며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정자의 명칭인 초연(超然)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글로,

노자는 “초연(超然)이란 인간 내면의 근본, 근저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외부의 세계와 공명을 일으키는 경지를 말한다.

초연이 되지 않고 몰연(沒然)이 되면 바탕과 괴리되어 미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무릇 성인은 언제나 초연에서 언행하고 사유해야 한다”고 했으며,

조선시대 말엽 유불선에 모두 능했던 월창거사 김대현(金大鉉)은 "술몽쇄언(術夢풏言)"에서,

“세상에는 간혹 세간의 속된 일에서 벗어나 홀로 근심 없이 사는 이가 있다.”라고 "초연"을 설명하고 있어,

조선시대 선비에게는 물외(바깥세상)에 초연하여 높은 절개를 지닌 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근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높게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자의 대부분이 풍광이 좋은 강변이나 언덕에 자리하여 트인 경관을 조망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초연정은 왕대마을 뒷산의 깊은 계곡위에 자리하여 매우 드문 형태라 할수 있으며,

정자에서는 나무에 가려져 바로 앞에 흐르는 계곡은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특이 합니다.

 

 

 

모후산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초연정은 그 이름대로 세속에서 벗어나 홀로 근심 없이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을 지닌 별서정원이며,

세상의 온갖 번뇌와 시름을 잊어버리고 물외무우(物外無憂)의 경지인 초연의 세계로 몰입 할수도 있을듯 합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내려와 간이 부엌이 있는곳을 찾아 봅니다.

 

 

 

온돌방에 불을 넣은 흔적이 있는 아궁이 이며,

 

 

 

쪽문을 두어 방으로 통할수 있게 해두었고,

윗쪽에 다락도 있어 벽으로 막혀있지 않아서 일뿐 부엌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정자의 뒤편에서 작은키에 기와를 올린 앙증맞은 굴뚝도 볼수가 있고,

 

 

 

초연정(超然亭)을 돌아보고 옆의 돌담장을 따라 윗쪽으로 나옵니다.

 

 

 

위로 오르면 길옆에 안내문이 있고 암각된 글씨가 있어,

 

 

 

세로로 쓰여진 월청(月淸)의 글씨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왕대(旺垈)와 유경(留京)을 통합해 삼청리(三淸里)라 하였는데,

삼청리는 물이 맑다고 수청(水淸), 바람이 맑다고 풍청(風淸), 달이 맑다고 월청(月淸)이라 하여 삼청(三淸)이라 하였다고 하며,

초연정의 주인 조진충이 새겼는지, 또 다른 누가 새겼는지 알수 없으나 이러한 명문 때문에 리명(里名)을 얻었다고 합니다.

 

 

 

산간 계곡을 이용하여 지어진 특이한 예의 별서로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주변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경관적 가치가 큰 명승지로,

자연과 인간의 적절한 연계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물외무우(物外無憂)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곳으로,

전남 순천의 별서 초연정(超然亭) 원림(園林)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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