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 를 여행 하면서,

봉두리 호평산(虎坪山) 기슭에 있는 구강재(龜岡齋)를 찾았습니다.

 

성주댐의 호반을 따라가는 길인 성주로의 우측길옆에,

구강재(龜岡齋)의 표지석이 보이고,

 

 

 

돌계단을 따라 조금 오르면 구강재(龜岡齋)의 모습이 보이며,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80호로 지정되어 있는 구강재(龜岡齋)는,

남전향약을 처음으로 시행한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1481∼1553)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8년(명종 13)에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齋室)로서,

1996년 성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습니다.

 

 

 

재실(齋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겹집형이며,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마루쪽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 하였으며,

전면 3칸은 모두 마루로 되어 있고 후면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을 두고 왼쪽 1칸은 마루로 꾸며 평면적으로 보면 마루는 "ㄱ"자 형이 됩니다.

 

 

 

구강재(龜岡齋)의 오른쪽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규모의 관리사로 보이는 건물이 있고,

 

 

 

왼쪽의 마당에는 윗부분이 없는 비석이 한기 서있습니다,

 

 

 

재실(齋室)의 주인 조선 중기의 학자 여희림(呂希臨,1481∼1553)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천지(天之) 호는 원정(圓亭) 성주 출생으로,

18세에 용봉산(龍鳳山)에 있는 절에 들어가 도형(都衡)·이광(李光) 등과 함께 학문을 닦았는데,

그 해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이 화를 당하자 이에 과거볼 생각을 단념하고 사림(士林)으로서 지냈으며,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도의로 교우를 맺었으며,

1510년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변역(變易)·소장(消長)의 이치에 관해 문답, 서로 계합한 바 있었고,

1516년 고향에 내려가 주자(朱子)가 가감, 증보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 하였습니다.

1517년 정광필(鄭光弼)의 추천에 의해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복성군(福城君)의 사부가 되었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여희림의 형 여희단(呂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거절하여 기묘사화에 화를 면 하였으며,

1533년 김안로(金安老)가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을 연일(延日)로 귀양보낼 때,

전일에 사부를 지냈다는 이유로 기장(機張)에 유배 되었다가 함평으로 이배 후 풀려 났습니다.

1538년 다시 등용되어 지평에 이르렀으며 사후 성주의 천곡사(川谷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 그의 사적 등을 수록한 "원정실기(圓亭實紀)"가 있습니다.

 

 

 

여희림 선친의 묘터가 "강에서 놀던 거북이가 알을 낳기위해 오르는 형국" 이라고 하는데서 연유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여희림(呂希臨)을 추모하는 재실(齋室)로,

외진곳에 자리하여 관리에 어려움은 있겠으나 문이 닫아두어 아쉬움이 남았던,

경북 성주의 "봉두리 구강재(龜岡齋)" 방문기 입니다.

 

 

경북 성주시 금수면 봉두리 산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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