걍상북도 성주군 월항면에 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의 재실(齋室)인 백인당(百忍堂)을 찾았습니다.

 

경상죽도 문화재자료 제 287호로 지정된 성주 백인당(百忍堂)으로,

입구는 문이 닫혀 있어 아쉬움이 있으며 담장을 따라 돌면서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백인당(百忍堂)으로 들어가는 3칸의 외문에는 태화문(太和門)의 현판이 걸려 있고,

 

 

 

대문의 왼쪽에 정면 4칸의 맞배지붕의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보이는 부속 건물이 있고,

 

 

 

마당을 자나면 중문이 있고 백인당(百忍堂)으로 들어갈수 있으며,

 

 

 

들여다 보면 중문은 열려 있지만 외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습니다.

 

 

 

성주 백인당(百忍堂)은 경산이씨(京山李氏) 집성촌인 백인마을의 상단 검암산(儉岩山)기슭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재실(齋室)로,

학가재(學稼齋)는 이주와 사월정(沙月亭) 이륜(李綸)이,

1661년(현종 2)에 선조인 소부윤(少府尹) 이함(李)과 양양부사(襄陽府使) 이번(李蕃),

대사헌(大司憲)이흥문(李興門)을 추모하는 대종재(大宗齋)로서 건립하였으며,

 

 

 

백인당(百忍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화강암(花崗巖)을 사각으로 다듬은 돌 기단 위에 중앙의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앞쪽만 원형기둥을 세우고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구조에 상부가 좁고 하부가 넓은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을 얹어 지붕을 받치도록 되어 있으며,

양쪽 온돌방 앞쪽으로 퇴칸을 두고 난간을 세워 집의 격을 높였습니다.

 

 

 

백인당(百忍堂)의 유래는,

당나라 고종이 태산(泰山)에서 천제(天祭)를 지내고 운주를 지나는 길에 장공예(張公藝)의 집에 들러,

그들이 화목한 비결을 물었을때  장공예(張公藝) "참을 인(忍)" 100자를 써서 올렸는데,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太和,백번 참는 가운데 가정화목이 있다)”란 말이 유래가 되어,

백인당(百忍堂)은 화목한 가족의 대명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백인당(百忍堂)은 종친간의 화목을 바라는 뜻에서 “인지위덕(忍之爲德), 내이위인(耐以爲仁)”이라는 성현(聖賢)의 말에서 따왔다고도 전하며,

경산이씨(京山李氏) 집성촌인 마을 이름도 백인당(百忍堂)의 당호(堂號)를 따라 "백인마을"이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백인당(百忍堂)의 외문 안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된 "성주 백인당 향나무"가 있어,

조선 세종조에 이흥문(李興門)이 제주목사를 지내고 돌아올때 제주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수령 600여 년의 탐라향목(耽羅香木)이라 불리며,

원래 경산이씨 문중재사인 백인당(百忍堂) 담장 밖에 있던 향나무를 2008년 담장 안으로 이식 하였다고 합니다.

 

 

 

고택과 정자를 위주로 하는 문화재를 답사하는 여행길에서,

시간을 내어 먼길을 찾아 와야 할때가 많은데,

문을 닫아놓아 담장 너머로만 돌아보고 발걸음을 돌릴때가 가장 아쉬움이 남게 되는데,

그나마 대문에 연락처라도 적어두는 경우는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여서,

담장 너머로만 볼수 있는 경산이씨(京山李氏)의 재실(齋室) 경북 성주의 백인당(百忍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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