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조선 전기의 건축물로,

단종(端宗)과 관련한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의 은거지 공북헌(拱北軒)을 찾았습니다.

 

공북헌(拱北軒)은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37호로 지정 되었으며,

주차공간이 있어 주차는 편한 편입니다.

 

 

외문인 일각문을 들어서면 "ㄷ"자 형의 건물이 나오고,

 

 

 

"ㄷ"자 형의 건물은 길게 마주하듯 서 있으나,

 

 

 

마치 등을 맞대고 있는듯 서로 반대방향으로 자리하고 있어 특이하며,

 

 

 

중문을 지나면 소담한 규모의 공북헌(拱北軒)이 자리하고 있어,

이수형(李秀亨, 1435 - 1528)은 음보로 관직에 올라 전생서령과 평시서령을 역임하였으나,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 찬탈이 이루어지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처가가 가까운 경상북도 봉화 도촌에 하다가,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이 사사되자,

산에 들어가 단종(端宗)의 능침이 있는 영월 쪽(북향)으로 삼면은 벽이고 북쪽을 향해 문을 낸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 하였던 곳으로,

 

 

 

공북헌(拱北軒) 이란 이름은 "이 방을 곧 높고 깊은 천인실(千仞室)이라 하고 저 마루를 두 손으로 맞잡고,

평생토록 단종에 대한 공경하던 뜻"을 표해온 공북헌(拱北軒)이라고 하였던 것에서 유래 한다고 하며,

천인실 의 천인(千仞)은 천 길이라는 뜻으로,

산이나 바다가 높거나 깊은 것을 이르는 말로서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리는 집" 이라는 의미 입니다.

 

 

 

공북헌(拱北軒)은 정면 1칸, 측면 2칸반 규모에 맞배지붕릐 구조로,

맨 안쪽 남향에 온돌방 1칸을 놓고 그 앞쪽 북향에 마루 1칸 반을 두었으며,

북향으로 집을 짓고 북쪽으로만 개방하여 마루와 실을 배치한 평면 구성과 3면을 벽으로 하고 북쪽으로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건물구성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 이라는 충절의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한 아주 독특한 구성이 특이 합니다.

 

 

 

뒷쪽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으며,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은 이수형이 단종을 깊이 사모했다는 뜻에서 공북헌(拱北軒) 편액을 달고 시(詩)를 남겼는데,

丈室沈沈小似盤(장실침침소사반)    좁은 방은 작은 반과 같은데

開門唯見越中山(개문유견월중산)    문을 열면 보이나니 영월땅의 산뿐일세

東遊白馬何時返(동유백마하시반)    동쪽으로 백마 타고 간 님 어느 때 돌아올까

獨魄鵑聲夜夜寒(독백견성야야한)    두견새 우는 소리 차갑기만 하여라

 

 

 

공북헌(拱北軒)을 지은 이수형(李秀亨, 1435년 ~ 1528년 1월 24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시인, 학자로,

본관은 우계이며 자(字)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공북헌(拱北軒)이다. 한성부 출신이며,

음보로 관직에 올라 선교랑(宣敎郞) 전생서령(典牲暑令)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고,

1455년(단종 3년)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봉화군 도촌리로 은거 하였으며,

원호, 조여 등과 함께 영월에 유배된 단종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으며,

세조(世祖는 사람을 보내 이수형(李秀亨)을 회유하였으나 거절하였고,

단종이 사사되자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이고 북녘으로 문이 있는 집을 짓고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이는 단종의 장릉이 영천의 북쪽에 있기 때문 이었으며,

1476년(성종 6)에 다시 작첩이 내려졌으나 거절 하였고 일생동안 단종을 추모하였습니다.

봉화읍 도촌리에 그가 손수 심은 괴화나무를 심었는데 그가 죽자 따라 고사하였다가,

1715년(숙종 41) 단종이 노산군에서 임금으로 복위되자 괴화나무가 소생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며,

사후 철종때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가증 되었습니다.

 

 

 

단종(端宗)에대한 추모로 천인실(千仞室)을 짓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심으로로 일생을 살았던 이수형(李秀亨)의 충절을 살펴 몰수 있는곳,

경북 봉화의 "공북헌(拱北軒)"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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