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를 여행하면서,

나주지역의 대표적인 정자로 덕용산 아래 철천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만호정(挽湖亭)"을 찾았습니다.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에 자리하고 있는 만호정(挽湖亭)으로,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만호정(挽湖亭) 앞과 옆에는 여러기의 비석군이 있고,

 

 

 

정자 곁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암각한 만호정(挽湖亭)의 표지석이 있으며,

 

 

 

만호정(挽湖亭)을 세운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삼국새대라 하기도 하며, 고려 전기에 지었다고 전하며,

처음에는 소나무가 무성하다고 "무송정(茂松亭)"이라 하였으며,

그 뒤 마음을 쾌하게 한다 하여 "쾌심정(快心亭)"으로 고쳤으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면서 "영평정(永平亭)"이라  불렀고,

선조 34년(1601)에 다시 고쳐 지으면서 "만호정(挽湖亭)"이라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이곳 정자에서 향약(鄕約) 및 동규(洞規)를 시행하였는데 그 내용이 정사기(亭史記)와 철야대동계안(鐵冶大同契案)에 전하고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향약(鄕約) 및 동규(洞規)의 표현인듯 그리 크지않는 석조물이 있어,

마을의 규약을 어기거나 불효한 자에 대하여 이돌에 묶어놓고 훈계 또는 매질을 가했던 돌이며,

당시 마을 규약의 엄격함을 엿볼수 있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자연석으로 둔 디딤돌로 마루에 올라 봅니다.

 

 

 

만호정(挽湖亭)의 현판으로,

현판은 모두 2기가 있는데 정자 전면에 있지 않고 2기 모두 마루에 올라야 볼수있으며,

 

 

 

만호정(挽湖亭)의 의미는,

"마을 앞까지 드나들던 영산강의 조수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다시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 해석 하기도 합니다.

 

 

 

만호정(挽湖亭)은 동규 등을 논의하는 아정동각(芽亭洞閣)으로,

그 성격이 중합된 영풍정자(詠風亭子)로서는 그 규모가 큰 개활무실형(開豁無室形)정자이며,

향약과 동규란 조선시대 시골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규칙으로 좋은 일은 서로 권유하고,

잘못은 서로 바로 잡아주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규약입니다.

 

 

 

만호정(挽湖亭)의 마루 위에는 많은 기문(記文)과 시문(詩文)이 올려져 있어,

 

 

 

시판들은 7언 율시의 시문(詩文)들이 가장 많은 편이며,

대부분이 차운시(次韻詩) 이며,

 

차운시(次韻詩)로 김재석(金載石), 고윤계(高允桂), 고광칠(高光七), 기노장(奇老章), 이동범(李東範)이,

각각 한수씩 향(鄕), 장(長), 상(桑), 향(香) 운자로 쓴 칠언율시 5수를 판각한 시문(詩文)이며,

 

 

 

 

 

이병연(李秉延), 최기남(崔基南), 장세민(張世珉), 곽종태(郭鍾泰), 정종묵(鄭琮黙) 다섯명이,

각각 한수씩 향(鄕), 장(長), 상(桑), 향(香) 운자로 쓴 칠언율시 5수를 판각한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이고,

 

 

 

김병조(金炳朝), 고광수(高光修), 한철수(韓哲洙), 윤주현(尹周鉉), 이영홍(李榮弘)이 각각 한수씩 쓴 칠언율시 5수의 시문(詩文) 편액 입니다.

 

 

 

만호정기(挽湖亭記)의 기문(記文)으로,

1971년 서요(徐鐃)가 쓴 기문(記文) 뒤에 향(鄕), 당(當), 상(桑), 상(霜)을 운자로 한 칠언율시가 한수 붙어 있으며,

만호정(挽湖亭) 주변경관의 아름다움과 서(徐), 정(鄭), 윤(尹) 세 가문에서 공동으로 관리했다는 내용과,

만호정을 중건했던 내용 및 조선말 1909년부터 애국운동을 이곳 만호정에서 했다는 사실 등이 담겨 있습니다.

 

 

 

서달수(徐達洙), 정도찬(鄭燾贊), 서중수(徐仲洙), 윤영칠(尹榮七) 이,

각각 한수씩 향(鄕), 장(長), 상(桑), 향(香) 운자로 쓴 칠언율시 4수를 판각한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 편액이며,

 

 

 

차운시(次韻詩)로 조국현(曺國鉉), 원창규(元暢圭), 운요중(尹堯重), 송흥진(宋興鎭), 김용균(金容均)이,

각각 한수씩 향(鄕), 장(長), 상(桑), 향(香) 운자로 쓴 칠언율시 5수가 있는 시문(詩文)이 있고,

 

 

 

홍승천(洪承天), 서봉호(徐鳳浩), 이재건(李在健), 김영만(金永萬), 이종영(李鍾榮), 이주혁(李周赫), 김홍구(金弘九) 일곱명이,

각각 한수씩 남긴 칠언율시 7수의 편액이며,

 

 

 

김정회(金正會), 박철수(朴哲洙), 임영재(任永宰), 형시백(邢時伯), 양규술(梁圭述), 이상형(李相衡), 강린(姜璘)이,

각각 한수씩 향(鄕), 장(長), 상(桑), 향(香) 운자로 쓴 칠언율시 7수를 판각한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이 있으며,

 

 

 

이상의(李相儀), 윤승호(尹承鎬), 노원태(盧源泰), 안재하(安在夏)가,

각각 한수씩 쓴 칠언율시 4수를 판각한 편액 입니다.

 

 

 

홍명희(洪明憙), 임정순(任珽淳), 유백중(柳栢重), 윤정복(尹丁鍑), 위계도(魏啓道)가,

한수씩 쓴 칠언율시 5수를 판각한 시문(詩文) 편액 이며,

 

 

 

역시 차운시로 김만철(金萬喆), 장동진(張東鎭), 장세순(張世順), 변상칠(卞相七), 이득운(李得運), 백영표(白永表), 문종식(文鍾植)이,

각각 한수씩 7수의 시문(詩文)이고,

 

 

 

금하(錦下) 서상록(徐相錄) 의 7언 율시의 시문(詩文) 입니다.

鏡以爲湖玉以岡     거울로 호수 삼고 옥으로 언덕 삼으니

永平亭鎭永平鄕     영평정이 영평고을을 진압하였네

簪纓故邑風聲遠     높은 관직의 옛 고을 명성이 유구하고

桃李名門德蔭長     도리의 명문가 음덕 장구하네

詩酒耆英今洛社     시와 술을 하는 기영이 오늘의 낙사이고

田園遺逸古柴桑     전원에서의 은둔함은 옛 도연명이네

一林一木千金重     한 숲의 나무 하나도 천금같이 중하거늘

最愛前人去後香    가장 애련한 것은 선인들 떠난 후 향기네

 

 

 

정도홍의 쾌심정중수기(快心亭重修記)로,

1930년 정도홍(鄭燾洪, 1878~1951)의 쾌심정 중수기(快心亭 重修記) 등을 통해 이 누정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최초에는 원일정(遠日亭)으로 불리어지다가, 무송정(茂松亭), 쾌심정(快心亭), 영평정(永平亭),

그리고 만호정(挽湖亭)으로 누정의 명칭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거기에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어 현재의 장소로 이건 재축 하면서 누정을 영평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난 세월의 쾌심정을 돌이켜보며 수계활동이 이루어졌다”라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철환(鄭喆煥)의 만호정기 병제(挽湖亭記幷題)로 정미년(1967년 추정) 정철환(鄭喆煥)이 쓴 기문(記文)으로,

기문과 함께 만호정 주변의 승경과 연혁을 소개하며 말미에 7언 율시의 시를 남겼습니다.

至今花葉滿庭香    지금까지 꽃과 잎사귀 향기 뜨락에 가득하네

山水南來第一鄕    산과 물 호남의 제일 고향이라네

徐孺鄭莊風韻古    서씨 아이 정씨 장정의 풍치 고풍스러운데

羅坮麗樹歲華長    신라 누각 고려 나무 세월 갈수록 화려하네

簪纓百世蕃桃李    고관대직으로 백세 보내니 문하생 번성하고

畊織千家老柘桑    밭 갈고 베를 짜며 온 집안 뽕밭에서 늙어가네

護社枌楡經浩㥘    큰 전란 넘어간 마을을 수호하는 느릅나무

至今花葉滿庭香    지금까지 꽃과 잎사귀 향기 뜨락에 가득하네

 

 

 

만호정기 병운(挽湖亭記 幷韻)으로 정미년(1967년 추정) 홍석희(洪錫憙)가 쓴 기문(記文)으로,

근처 "철천(鐵川)의 승경을 끌어다 온다"는 뜻으로,

만호라 이름짓게된 배경에 대한 설명, 만호정 주변 경관에 대한 자세한 소개 및 서(徐), 정(鄭) 양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담겨 있으며,

 

 

 

만호정기 병제(挽湖亭記幷題)의 기문(記文)으로, 

정미년(1967년 추정) 여창현(呂昌鉉)이 쓴 기문으로 기문과 함께 칠언율시가 한수 붙어 있으며,

고려시대 때부터 무송정(茂松亭), 쾌심정(快心亭), 영평정(永平亭) 등으로 불렸다가,

근처 철천(鐵川)의 승경을 끌어온다는 뜻으로 만호정이라 짓게 된 배경, 서(徐) 정(鄭)씨 두 집안이 함께 관래했다는 사실 및,

만호정에 오른 소회와 동초(東樵)선생의 부탁으로 기문을 짓게된 배경 등이 담겨 있습니다.

 

 

 

사면이 트여 있는 만호정(挽湖亭)의 마루에서 주변 풍경을 돌아 봅니다.

 

 

 

정자 주위에는 큰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어 새소리가 떠나지 않는다 하고,

뒷쪽에 있는 연못에 연꽃 피어나고 그 주위로 붉은 배롱나무꽃이 필때면 더욱 운치가 있다고 하며,

 

 

 

철야마을은 호남의 명촌으로 이천 서씨, 진주 정씨, 파평 윤씨가 향약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를 이루며 살아 왔고,

만호정(挽湖亭)은 이들 대동계의 명맥과 함께 해 왔으며 주민들 교육이나 마을 집회도 이 정자에서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만호정(挽湖亭)은 마을 주민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여 "철야양민학살사건"이 그것으로,

6·25전쟁 당시인 1951년 2월26일 새벽에 나주 봉황지서가 빨치산과 공비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만호정 앞으로 끌려 나오게 되었고 이때 좌익과 무관한 많은 마을 사람들이 희생 당했던 사건으로,

마을 앞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큰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으며,

여러 차례중건, 중수과정을 거쳤으나 건축양식이 고졸장대(古拙壯大)하며 영풍정자적(詠風亭子的) 성격과 아정(芽亭)으로서,

휴식적 성격 및 향약시행 등의 규범적 성격이 중합된 마을의 다기능 정각(亭閣)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정자의 기둥에는 돌아가며 둥글거나 네모난 홈을 볼수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만호정은 일본 헌병대로 사용되기도 하여 그곳에 마을 사람들이 갇히게되는 일도 있었다고 하며,

만호정 기둥 곳곳에 깊은 홈이 파인 것이 바로 그때 난 흔적 이라고 합니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만호정에서는 마을의 어른들이 항상 머물렀으며,

정자 앞을 지나는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만호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하며,

만호정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옷맵시를 다듬고 만호정에 앉아 쉬고 있는 어른들께 큰 절을 올려야 했기에,

젊은 사람들은 만호정앞을 비켜 뒤로 돌아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며 여자들은 감히 만호정에 올라갈 엄두조차 못햇다고 합니다.

 

 

 

천여년의 세월을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숱한 풍상을 지켜보아온 정자 이기도 합니다.

 

 

 

만호정(挽湖亭)은 평탄한 대지에 허튼층 막돌 토방을 다진 후,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고졸(古拙)한 두리기둥으로 정면 어간은 좁게 퇴문은 넓게 측면은 등문으로 기둥을 세웠고,

주두결구(柱頭結構)는 창방, 평방위에 연꽃무늬를 초각(草刻)한 절충식 이익공를 짰으며,

그 위에 대들보, 종, 중보를 두고 측면에서는 홍예보 위에 판대공을 설치하여 칠량가를 형성 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지붕은 팔작와가(八作瓦家)이며 처마에는 부록(附錄)을 달아 장려함이 더합니다.

 

 

 

정자 뒤편에는 장방형의 연지에 섬이 있는 쾌심지(快心池)가 있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선비 사상을 찾을수 있으며,

 

 

 

쾌심지(快心池)의 글이 있는 바위가 연못 가운데 섬에 자리잡고 있어,

만호정의 옛이름인 쾌심정(快心亭)에서 가져온듯 합니다.

 

 

 

향약(鄕約) 및 동규(洞規)를 시행하여 마을의 단결과 우호를 다져 왔으며,

노안면 쌍계정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로 나주를 대표 할만한 정자로,

시대의 흐름과 함께하여 마을의 역사를 드려다 볼수 있었던,

전남 나주의 정자 문화재 만호정(挽湖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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