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영암을 여행 하면서,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 있는 영보정(永保亭)을 찾았습니다.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보정(永保亭)으로,

 

 

 

영보정(永保亭)은 조선 초기  문종의 스승였던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1384∼1455)가 예문관 직제학을 지내며 ,

단종의 즉위와 함께 세조의 폭정에 반하여 관직을 떠난 후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사위 신후경(愼後庚)과 함께 지은 정자로 15세기 중반에 창건되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으며 창건 당시의 규모도 명확하지 않으며,

 처음 있던 정자는 황폐화 되어서 최정과 신천익(1592∼1661)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으며,

이때는 1630년 경에 지어 진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영보정(永保亭) 앞에는 여러기의 비석이 보이며,

오른쪽의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은 1937년 영암군수 이규대의 행적을 기린 이규대 행적비(李奎大 行績碑)로,

비면에 "행군수 이후 규대 영세불망비(行郡守李候奎大永世不忘碑)"라 되어 있고,

왼쪽 끝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니는 "산정 신선생 유장비"가 있습니다.

 

 

 

정자 앞에는 장방형의 긴 연못이 있어,

 

 

 

유교적 우주론을 반영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연못으로 보이며,

옛 선비들이 지조를 지키기 위함으로 정원 연못을 직각으로 만들었다는 연못으로,

일반적으로 네모난 연못에 둥근섬을 두는게 보통인데 섬은 보이지 않습니다.

 

 

 

연못 옆에는 연자방아를 두었는데,

아마도 후대에 가져다 놓은듯 여겨 지며,

 

 

 

처음 정자를 지었던 최덕지(崔德之,1384∼1455)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이며,

1405년(태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하고,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린 후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학문을 연구했으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으며,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하였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 갔습니다.

학식이 높고 행동이 단정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 지었으며,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 되었고,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불타버려서 한 권만 남아 있고 여러 현인들의 논설만 전하고 있습니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의 팔작지붕 이며,

중앙의 3칸, 뒤쪽으로 측면1칸에는 마루방을 꾸몄으며 그 외는 우물마루로 된 대청을 두었습니다.

 

 

 

정자의 4군데 모퉁이 에는 겹처마의 추녀를 활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며,

 

 

 

영보정(永保亭)의 현판으로 우리에게 한석봉으로 잘알려진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이며,

 

 

 

정면 5칸의 우물마루는 아주 넓게 보이며,

 

 

 

마루위를 가로지르는 전등은 정자와 무엇인가 어색해 보이기도 합니다.

 

 

 

정자의 뒤편에 자리한 3칸의 마루방은 전면에 모두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을 접어 들어올려 열어두면 대단할듯 하며 마루방의 윗쪽에는 다락방으로 보이는 곳도 있어,

영보정(永保亭)의 규모를 실감케 합니다.

 

 

 

마루방 윗쪽의 높은곳에도 또하나의 영보정(永保亭) 현판이 있으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8기의 시문(詩文)과 2기의 영보정중수기(永保亭重修記) 기문(記文)이 있으며,

영보정 중수 때 성금 등을 기탁한 이들의 명단으로 보이는 편액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1618년(광해군 10년) 양경우(梁慶遇 1568,∼?)가 조찬한(趙纘韓,1572~1631)과 함께 전남지역에 유람하면서,

영보정(永保亭)에 올라 지은 "야등영보정(夜登永保亭)"으로,

崖顚結構勢岧嶤    벼랑 끝 집을 엮어 형세가 험하고

畫棟雕樑近絳霄    화려한 기둥과 들보는 하늘 가깝네

人事古今留勝蹟    인사는 고금에 멋진 자취를 남기고

天機朝暮自寒潮    천기는 아침저녁에 조수가 흐르네

長洲雨過漁帆落    비 갠 모래톱에 어선이 돛 내리고

別岸煙籠蟹火遙    안개 낀 언덕엔 멀리 게 잡이 불빛

十二闌干秋月好    열두 난간에 가을 달이 아름다워

玉簾高卷夜橫簫    옥렴 높이 걷으니

玉簾高卷夜橫簫    한밤의 퉁소소리

 

 

 

정의현감을 지냈던  박명구(朴命球,1731~?)가 영보정에 올라 지은 시(詩)도 가져와 봅니다. 

仙庄松內外    선장에 안과 밖이 소나무이고

書閣竹中間    서각은 대수풀속에 있네

此盃難飮得    이 잔은 얻어 마시기 어려운 술잔

不醉可無還    취하지 않고 돌아가진 못하리라

 

 

 

영보정(永保亭)은 호남지방의 전형적인 정자 형식인 가운데 물려서 방을 두고 삼면을 마루를 두었는데,

일반적으로 정자는 정면3칸에 측면2칸의 규모가 대부분이나 영보정은 정면5칸에 측면3칸,

방은 정면3칸에 측면 1칸으로 마루는 방을 중심으로 "ㄷ" 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방에는 별도의 다락방도 설치하여 보통의 정자와는 크게 다르며 규모도 큰편 입니다.

 

 

 

또한 영보정(永保亭)은 일제강점기 때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교육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큰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이곳에 영보학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구국정신을 배양 시켰으며,

영암지역 청년들의 항일투쟁활동으로 꼽히는 1931년의 형제봉(兄第峰) 만세운동도,

영보학원을 중심으로 졸업생과 청년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어서,

영보정은 신교육과 구국정신을 함양한 학사로서의 큰 의미를 가지며,

지금도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에는 이곳에서 마을축제인 풍향제(豊鄕祭)가 열린다고 합니다.

 

 

 

4백 년이 넘은 소나무와  노거수 느티나무등이 숲을 이루어,

월출산이 보이는 너른 벌판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며,

학문 연구와 이마을 영보 대동계의 중심 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항일구국정신을 배양 했던곳으로,

전남 영암의 정자 문화재, 영보정(永保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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