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유허(遺墟)가 있는,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에 있는 천운정사(天雲精舍)를 찾았습니다.

 

경상북도 시도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상주의 천운정사(天雲精舍)로,

 

 

 

영조때 성리학자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1700년경에 건립한 정사(精舍)로,

상주 논실(外 )마을 끝부분 산아래 마을위 언덕에 자리 하였으며,

이만부(李萬敷)는 1697년에 34세로 서울에서 상주로 이거하여 천운정을 짓고는 독서와 교육, 선비의 집회 장소로 사용 하였으며,

학문과 교육 문학과 서도에 일가를 이룬 공간인 식산정사(息山精舍) 중 유일하게 보존 된 천운정(天雲亭)이며,

이 정사의 원래 이름은 천운당(天雲堂)으로 1700년에 세워 졌으나 천운당보다는 천운정으로 널리 알려 졌고,

1846년과 1892년에 중수하였고, 1893년 5월에는 천운당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 사림에서 계를 조직 하기도 했습니다.

 

 

 

정사(精舍) 아래에는 조감당(照鑑塘) 이라는 방형의 연당(蓮塘)이 있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선비사상을 표현해 둔듯한데,

연못 가운데의 둥근섬은 흙으로만 둥글게 해두어 마치 무덤을 연상케하고,

섬에 심어둔 한그루의 나무도 앙상하여 조성한지 얼마되지 않았슴을 보여주고 있어 어설퍼 보이기도 합니다.

 

 

 

정사(精舍)는 "ㄱ"자의 형태을 하고 있는데 앞에는 조감당(照鑑堂)이라는 연당이 있고 뒷편에 고반석(考盤石)이란 석축이 있으며,

"ㄱ"자 형중 앞쪽의 마루방은 천운당(天雲堂)으로 마루 2칸 인데 마루 한 칸은 누마루 형태를 취하여 정자(亭子)의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에서 연유하며,

꺽이는 부분의 2칸 온돌방을 양호료(養浩寮)라 하였다 하며 부엌 1칸이 부설되어 있습니다.

특이 하게도 같은 집이면서 부엌쪽은 팔작지붕을, 마루쪽은 맞배로 처리하는 변화를 추구 하였고,

삼량집, 홑처마로 아주 질박하게 조영 하였으며,

마루 앞쪽에는 기둥 같은 높은 주춧돌을 설치하여 연당을 바라보는 자리의 운치를 증대시키는 묘미를 발휘 하였습니다.

 

 

 

마루방으로 통하는 안쪽으 문위에는 이만부(李萬敷)의 호에서 가져온 식산정사(息山精舍)의 현판이 있고,

 

 

 

바깥쪽의 마루방 위에는 천운당(天雲堂)의 현판이 있습니다.

 

 

 

천운(天雲)이란 주자(朱子)의  "반무방당일감개(半畝方塘一鑑開)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란 시구(詩句)에서 인용하여,

천운당(天雲堂)이라 하였다고 하며,

 

 

 

마루방의 큰문은 보수를 하면서 고쳐 넣은듯 하며,

 

 

 

아담한 규모의 부엌의 뒷문도 바꾸어 단 모습이며,

여러곳에서 부분적으로 보수를 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문이 열려있어 마루방을 통하여 안쪽으로 들어가 봅니다.

 

 

 

2칸의 온돌방은 트여 있으며 부엌위 다락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고,

 

 

 

2개의 방 사이에는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접어 들어서 열수있게 되어 있어서 필요에 따라 트여서 하나의 방으로 쓸수있게 되어 있고,

 

 

 

마루로 통하는 문은 분합문(分閤門)을 달지 않았으며,

바루방도 양쪽에 문이 있어 밝은 편으로,

 

 

 

마루방에는 별도의 편액은 보이지 않습니다.

천운정사(天雲精舍)의 주인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서(仲舒), 호는 식산(息山)으로,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학문을 전수받았고 지취(志趣)가 고상하였으며, 정주학(程朱學)에 심취 하였으며,

1729년(영조 5) 학행(學行)으로 장릉참봉(長陵參奉)과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하였고,

평생을 학문으로 일관한 선비로서 한국실학사에 실심실학자(實心實學者)로 유학사에서는 자가설(自家設)을 수립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서도에서는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의 대가로 문학사에서는 문장가로 일가를 이루었고 그 외 음악, 회화, 예악에도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며,

만년에는 역학(易學)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 하였습니다.

저서로 문집인 식산문집(息山文集)외에 역통(易統), 대상편람(大象便覽), 사서강목(四書講目), 도동편(道東編), 노여론(魯餘論) 등이 있으며,

문경의 근암서원에 배향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잘알려지지 못했던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그의 저서중 "지행록(地行錄)"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기행문이자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로 가치가 높다고 하며,

장백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지방에서부터 남해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손수 돌아보고 쓴 놀라운 저작으로,

그 중에서 금강산의 바위들을 묘사한 대목은 문학적 으로도 완성도가 뛰어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후학 양성에도 힘써,

운음 노계원(雲陰 盧啓元), 백화재 황익재(白華齋 黃翼再), 이안당 조천경(易安堂 趙天經) 성호 이익(星湖 李翼)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저명한 학자를 길러 내었던 인물입니다.

 

 

 

이만부(李萬敷)와 관련한 일화로,

이만부는 숙부인 동애(東厓) 이협(李浹)과 함께 조령을 넘어서 영남으로 낙향하여 상주에 정착하고 숙부는 안동에 정착 했는데,

그는 한성을 떠나기 전 숙부와 함께 예조참판인 아버지를 따라 입궐하여 숙종에게 낙향 인사를 드렸고,

숙종은 그들의 낙향 결심이 확고부동한 것을 알고 넌지시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그대들이 영남으로 낙향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영남에 그대 집안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이 몇이나 될까?"

"성은이 망극하오나, 조령을 넘으면 버들잎과 (오얏)자두뿌리가 발에 걸릴 듯 하옵니다."

누구의 대답 였는지 밝혀두지 않고 있으나,

버들잎은 류서애의 풍산 류씨를, 자두뿌리는 이퇴계의 진성이씨를 이른 말로 오늘에 전해지고 있으며,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는 숙종 연간에서 영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상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일원에서 혜성 같은 존재의 석학거유 였습니다.

 

 

 

북향한 정사(精舍)의 구조는 산자락 경사를 이용해 건물, 화단, 연못의 3단계로 구성되고 경계를 자연석 돌담으로 쌓아 경계를 이루었으나,

이만부(李萬敷)가 기록한 "노곡기(魯谷記)"에 이곳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있어,

현존하는 정사(精舍)와 연당 외에도 고반석 위로 민지정(民止亭)이 천운당에서 안채쪽으로 종정교(淙淨橋)라는 다리가 있어 복천(伏泉)을 건너게 되었고,

 천운당 서편 담장밖에 세한단(歲寒壇)이 연못인 조감당 북쪽에 애련암(愛蓮岩)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문 가문의 자손으로 벼슬과 넉넉한 삶이 보장 되었지만 학문에만 정진하며 평생을 학문으로 일관한 참된 선비로,

벼슬을 뿌리치고 낙향하여 청렴한 삶을 살며 높은 학문의 경지에 올라 수많은 저서와 후학을 길러 내었으나,

벼슬을 멀리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못했던  유교문화의 거두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정신이 남아있는곳으로,

경북 상주의 문화재, "천운정사(天雲精舍)"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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