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부곡면 임해진 삼거리 부근에 있는,

낙동강변 조선시대의 정자 소우정(消憂亭)을 찾았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떨쳐 버린다는 이름의 "소우정(消憂亭)"으로,

임해진(臨海津) 나루터 청학로로 접어드는 비룡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소우정(消憂亭)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은 굳게 닫혀있어 담장너머로 보아야 하며,

 

 

 

소우정(消憂亭)은 벽진(碧珍) 이씨(李氏) 가문의 조선 중기의 학자 소우헌(消憂軒) 이도일(李道一)이,

만년에 임해진(臨海津) 강가에 강정(江亭)를 지어 소우헌(消憂軒)이라 하였는데,

정자의 터가 매우 좁아 겨우 무릎을 용납할 만하다고 하여 용슬헌(容膝軒)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소우정은 1990년 중건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왼쪽 안쪽에 1칸 정도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5칸은 모두 마루를 두었습니다.

 

 

 

이도일(李道一,1581~1667)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제현(諸賢)으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 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12세 되던 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강릉(江陵)으로 피신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의병에 가담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전공을 세웠으며,

광해군 8년(1616)에 음직으로 천거(薦擧)되어 부사용(副司勇)이 되고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 태종(淸太宗) 용골대(龍骨大)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창의(倡義)하여 그의 창고정곡(倉庫正穀) 400석을 군량미(軍糧米)로 수송(輸送)하고 의병(義兵)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으며,

이후 김상헌(金尙憲)의 천거로 칠월현감(漆原縣監)을 제수했으나 역시 사양 하였고,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주장이 맞섰으나,

결국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한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통곡하면서 북벌책(北伐策)을 상소하여 설욕하고자 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어필(御筆)로 동지중추(同知中樞)를 특제(特除)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려 졌습니다.

문집으로 소우헌집(消憂軒集)이 전하며 창녕(昌寧) 덕림서당(德林書堂)에 제향(祭享) 되었습니다.

 

 

 

허리를 한껏 꺽여 흘러 들어와 휘돌아 다시 나가는,

낙동강변의 한 폭의 그림 같은곳에 자리 하였으나 세월의 흐름으로 옛날의 풍광은 찾기 힘듭니다.

 

 

 

임해진(臨海津)은 하구둑이 조성되기 전에는 바닷물 조수가 여기까지 밀려 왔다고 하며,

임해진 맞은편 강 건너 북면 명촌에는 옛날 창원의 관문인 주물연진(主勿淵津)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가기 위해 거쳐가던 곳이면서 일본사신들을 맞이 하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소우헌(消憂軒) 이도일(李道一)의 행적을 찾을수 있는 곳으로,

개방이 아쉬웠던 경남 창녕의 낙동강 하류의 정자, 소우정(消憂亭)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