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에 있는 읍성,

청도 읍성(淸道邑城)을 찾았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 되었으며,

주차장 시설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안내문을 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청도읍성 입구 왼쪽에는 석벽아래에 줄지어 서있는 선정비를 볼수있어,

선정비군(善政碑群)은 모두 30기로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조에 건립 되었으며,

읍성 외곽의 주요 도로변의 것을 도주관에 보관해오다가,

2008년에 이곳 동문지 주변으로 이건 하였습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옛 청도읍의 중심에 축조된 읍성으로 평면이 사각형 형태이며,

규모를 살피기에는 너무 훼손되어 있어 잘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성벽은 길이 1,570보(약 1.9㎞), 높이 5척 5촌(약 1.65m)이었다고 합니다.

 

 

 

읍성 안쪽에는 2013년 복원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고마청(雇馬廳)이 있어,

 

 

 

고마청(雇馬廳)은 읍성 인근에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던 관아 이며,

조선 정조(正祖)대인 1895년에 제작된 청도군읍지(淸道郡邑誌)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청도읍성(淸道邑城)은 석축과 토축, 혼합 토성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 초기에 이미 석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며,

문헌 기록상으로 1589년(선조 22)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리자,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대로변에 접한 주군(州郡)의 성지(城池)를 수축하라는 왕명에 따라,

1590년(선조 23)에 군수 이은휘(李殷輝)가 2년에 걸쳐 개축 했으나,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동·서·북문이 소실(燒失)되는 등 크게 파손되었다고 하며,

그 뒤 1669년(현종 9)에 군수 유비(兪秘)가 서문인 무회루를 건립했고, 동문인 봉일루는 1708년(숙종 34)에 군수 임정(林淨)이 건립했으며,

1870년에 군수 김이교(金履橋)가 남문인 진남루을 건립함으로써 4성문을 갖추게 되어 조선조 말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1920년경 일제가 성내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성문과 성벽을 헐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강지 축조 시에 성돌을 제방 축조에 사용하게 되어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어,

2010년에 북쪽 성벽 치성과 성내지, 남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하고, 북쪽 성벽 일부 구간을 복원 정비 중에 있습니다.

 

 

 

2012년경에 복원한 복원된 북쪽 성벽 치성으로,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이며,

 

 

 

공북루(拱北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옹성인 북문앞에는 치성과 태극문양의 해자(垓子)를 볼수 있으며,

옛날의 해자(垓子)는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수변공원으로 꾸며 두었습니다.

 

 

 

북문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선정비군(善政碑群)을 다시 보면서 비는 없고 머릿돌과 거북형상 등의 귀부만 남은 모습을 보고 석빙고로 향합니다.

 

 

 

보물 제323호 청도 석빙고(淸道石氷庫)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얼음 저장 창고로,

1713년(숙종 39)에 건립되어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석빙고이며,

 

 

 

석빙고(石氷庫) 앞에는 1713년(숙종 39)에 세운 석비가 있어,

앞면에는 당시 공사에 쓰인 자료·비용과 동원된 인원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석빙고(石氷庫)는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석빙고 가운데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내부의 길이는 14.75m, 폭은 5m이고, 높이는 4.4m의 크기로,

 

 

 

빙실로 내려가려면 1.9m에 이르는 9개의 계단을 통해야 하는데,

현존하는 석빙고 가운데는 빙실을 가장 깊게 조성 하였으며,

계단 부재에 양 끝에 문지도리 홈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을 통해서,

양쪽에서 여닫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합니다.

 

 

 

빙실의 바닥은 깬돌(割石)을 깔아 편평하게 다졌으며,

입구인 서쪽을 동쪽에 비해 조금 높게 하여 5° 가량 경사를 지게 해두었고,

바닥의 중앙에는 배수로를 설치하여 얼음이 녹으면서 생긴 물이 외부로 빠져나가도록 설계 하였습니다.

 

 

 

석빙고(石氷庫)의 맨 안쪽에는 큰돌을 세워 뒷벽을지탱해둔 모습이 보이며,

 

 

 

다른 지역의 석빙고와 비교해 볼 때,

청도 석빙고 역시 천장에는 환기 구멍을 두어 통기(通氣)가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천장 외부는 회를 일정한 두께로 시공한 다음 표면은 흙을 덮어 마무리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석빙고와의 비교를 통해 빙실의 규모에 따라,

설계 때부터 빙실을 설치할 지하의 굴착 깊이, 천장의 두께 등을 조절하여 효과적으로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고안된 사실도 밝혀 졌으며,

이러한 점은 청도 석빙고가 과학적으로 설계되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조선 후기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청도 석빙고(淸道石氷庫)는 바깥으로 나와서 보면,

아치형의 지붕부분만 나와있어 많은 부분이 땅속으로 들어가 있슴을 알게 됩니다.

 

 

 

청도 석빙고(淸道石氷庫)는 동서로 길게 뻗은 구조로 입구는 서쪽에 두었으며,

이곳에서 불과 5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는 동천(東川)으로 불리는 작은 하천에서,

겨울철 동천에서 채취한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 진것으로 보입니다.

 

 

 

경상남도 청도를 여행 하면서 찾은 문화재로,

옛 청도의 중심 이었던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 청도읍성(淸道邑城)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빙고로 보물 제323호 청도 석빙고(淸道石氷庫)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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