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성주를 여행 하면서,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찾았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622년(광해군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627년 준공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에 "회연(檜淵)"이라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4년에 정부의 보조와 지방유림의 협력으로 복원 하였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의 정문격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

 

 

 

누각은 견도루(見道樓)로 "도를 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회연서원의 옛 모습을 그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그림 "정선(鄭敾)(檜淵書院)"으로,

청하 현감 시절 정선(鄭敾)이 정선(鄭敾)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며,

그림에는 서원 앞에 수직으로 솟구친 바위산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전국의 구곡 가운데 영남을 대표하는 구곡인 무흘구곡 제1곡 봉비암(鳳飛巖)을 표현 하였는데,

그림과 같은 위치에 회연서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 바위가 그렇게 솟구쳐 생기지도 않았지만,

겸재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게 할 만큼 경관이 좋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것이며,

겨울인 듯, 나무들이 모두 앙상하게 가지만 남기고 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어,

한강 정구 신도비(寒岡 鄭逑 神道碑)로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12호로 지정 되었으며,

1633년(인조 11)에 수륜면 수성리 갓말마을 뒷산인 창평산 묘소 부근에 세워졌다가,

한강 정구의 묘소를 성주읍 금산리 인현산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1668년(현종 3)에 현재의 위치인 회연서원 경내로 옮겨 세워 졌으며,

신도비는 비신(碑身), 이수(螭首), 귀부(龜趺)가 완전하게 잘 남아 있고,

이수에는 쌍룡문(雙龍紋)과 여의두문(如意頭紋)이 깊이 새겨져 있고 귀부는 귀갑문(龜甲紋)이 양각으로 얕게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었고, 글씨는 김세렴(金世濂)이 썼습니다.

 

 

 

신도비에서 경내로 들어가면,

삼문을 두고 별묘인 향현사(鄕賢祠)가 자리해 있어,

 

 

 

제향공간인 향현사(鄕賢祠)에는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 등 위판이 봉안 되어 있습니다.

 

 

 

향현사 서편는 강학공간인 경회당(景晦堂)이 있어,

 

 

 

경회당(景晦堂)으로 들어가는 사주문은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보아야 합니다.

 

 

 

강학공간은 강당과 동재, 서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인 명의재(明義齋)는 유생들의 숙식공간이며,

 

 

 

서재는 지경재(持敬齋)이며,

1976년에 동.서재(東.西齋)를 신축 하였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의 강당 경회당(景晦堂)으로,

"밝은것과 어두움 어두움을 밝게 한다" 라는 의미로 회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홑처마의 맞배지붕의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경회당에서 서편으로 이동하면 정문격인 솟을 삼문이 자리해 있어,

맨안쪽에 잇는 사당 부터 보아 왔기에 서원의 뒤쪽에서 온것임을 알게 됩니다.

 

 

 

삼문 왼편에 숭모각(崇慕閣)이 있어,

숭모각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저서및 문집의 각종 판각등 유물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조선 중기 낙동강 중류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는 낙동강 상류 지역의 퇴계 이황과 낙동강 하류 지역의 남명 조식 양 문하에 나아가 그들의 성리학과 사림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영남 남인계 예학을 집대성하고 목민관을 거친 곳마다 지방지를 편찬하는 등 경세학 방면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학문적 성과는 근기지역 퇴계학맥으로 이어져 경세치용의 실학으로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회연서원(檜淵書院)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한강(寒岡)이 선조 16년(1583년)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처음 한강은 그의 선영이 있는 창평산 한강(寒岡)에 정사(精舍)를 지어 10여 년 동안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찾고 이에 따른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자신의 학문적 성숙은 물론,

문인들의 결속 및 확대를 위한 본격적인 강학 활동을 위해 정사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에 초당을 건립 하였으며,

두어 칸 규모로 건립한 초당의 이름을 회연(檜淵)이라 한 것은 여러 설이 있는데,

초당의 배경이 된 봉비암(鳳飛巖)이 대가천변에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 회오리처럼 도는 깊은 소가 "회연(回淵)"이며,

이것이 후에 "회연(檜淵)"으로 바뀌었다는 설과,

회나무가 연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회연(檜淵)"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숭모각의 오른쪽에 일각문이 있어,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해 있으며,

 

 

 

숭모각 뒤편에는 또다른 제향 공간이 자리해 있어,

구(舊)사당으로 보이는 사당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주향(主享)으로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유허에 자리하여,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던 곳으로,

사액서원으로 이른 봄의 매화가 아름다운 곳으로,

경북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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