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마을에 있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정자 망우정(忘憂亭)을 찾았습니다.

 

우강리 마을에 있는 망우정(忘憂亭)으로 들어가려면,

길에서 낮은 언덕을 올라서야 하며 겨울 오후의 햇살이 가득 들어 옵니다.

 

 

 

낮은 언덕을 오르면 낙동강의 전경이 펼쳐지며,

정자의 뒤편에는 2기의 비가 있어,

 

 

 

비각이 없는 비석은 "충익공 망우당 곽선생 유허비(忠翼公 忘憂堂 郭先生 遺墟碑)"로

옆의 휴허비의 비각을 세우면서 선생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을 함께 적어 1991년에 세운것이라 하며,

 

 

 

비각이 있는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忠翼公 忘憂堂 郭再祐 遺墟碑)"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으며 비각은 1991년 창녕군에서 세웠고,

 

 

 

비는 높이 180㎝, 너비 70㎝의 크기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에 비 윗변의 양끝을 비스듬히 다듬은 모습이며,

1789년(정조13년)에 세운 유허비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전공을 세운 것을 기념해 고을의 유림들이 세웠고,

 

 

 

비각안에는 비각의 건립과 비의 유래를 알수있는 기문(記文)이 자리해 있습니다.

 

 

 

망우정(忘憂亭)은 사주문과 정자 그리고 담장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협문인 사주문은 동쪽으로 나 있는데,

낙동강변의 직벽위에 정자가 자리해 있고 터가 좁은편여서 문을 동쪽으로 내둔듯 하며,

 

 

 

망우정(忘憂亭)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만년을 보낸 곳으로,

임진왜란 중이던 1594년 장군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 되었으나, 

왜적의 재침을 대비하기 위한 도산성 수축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이유로 삼아 사직서를 올리고 조정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은 채 군영을 떠났는데,

사헌부에서는 이를 문제삼아 독만(瀆慢)이란 죄명으로 탄핵 당하여 전라도 영암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2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현풍의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잠시 은둔 하다가,

1602년 영산현 남쪽 창암진(蒼巖津, 지금의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이곳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기거하였습니다.

 

 

 

곽재우(郭再祐)는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았는데,

이는 이순신장군의 투옥과 절친했던 의병장 김덕령의 무고한 옥사(獄死) 때문 이었다고 하며,

1604년과 1610년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관직에 나간 적이 있으나,

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우윤·한성부좌윤·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수차례 거절하고,

 나룻배를 띄워 낚시를 하고 거문고와 차를 가까이 하며 망우정에서 만년을 보냈으며 66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습니다.

 

 

 

망우정(忘憂亭)의 현판으로,

망우정은 "근심을 잊고 살겠다"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망우당(忘憂堂)이라는 곽재우의 호(號)도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여현정(餘賢亭)의 현판도 나란히 걸려 있어,

곽재우(郭再祐)는 죽기 전에 외손 되는 벽진이씨(碧珍李氏) 이도순(李道純)에게 망우정을 물려주었는데,

그 후로 정자의 명칭이 "어진 이에게 물려주다"라는 의미인 "여현정(餘賢亭)"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마루 위에는 여현정기(與賢亭記)의 기문(記文)이 있고,

 

 

 

여현정중수기(與賢亭重修記)의 기문(記文)으로 2기의 편액만 올려져 있습니다.

 

 

 

2칸의 온돌방은 트여 있으며,

마루쪽으로는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두어 밝은 편이며,

 

 

 

정자의 마루에서 시원하게 펼쳐지는 낙동강을 내려다 봅니다.

 

 

 

곽재우(郭再祐)의 시(詩) "강정으로 돌아오다"란 의미의 귀강정(歸江亭)을 가져 옵니다.

誤落塵埃中      혼탁한 세상을 살다 보니

三千垂白髮      수많은 흰 머리카락만 드리워졌네

秋風野菊香      가을 바람에 들국화 향기 그윽하여

策馬歸江月      달밤에 말을 달려 강정으로 돌아왔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정도의 규모로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조선후기의 양식이 많이 보이며,

한국전쟁 때 소실 되었다가 1972년 벽진이씨(碧珍李氏) 후손들이 중수하였고

1979년 창녕군에서 전면 보수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풍 곽씨와 벽진 이씨 문중에서 1년에 두 번 망우정에 모여 함께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곽재우(郭再祐,1552~1617)은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여,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운 의병장으로,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 되었으며,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 쳤으며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후 1년후인 1618년에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현판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충절과 유허를 살필수 있으며,

병란후 벼슬을 마다하고 세상사 근심을 모두 끊고 정사(精舍)를 지어 불에 익힌 음식은 먹지 않고 생식(生食)을 하며 살았다고 하는 곳으로,

경남 장녕의 낙동강변의 정자, 망우정(忘憂亭)과 함께있는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유허비(忠翼公 忘憂堂 郭再祐 遺墟碑) 방문기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