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송전리에 있는 조선후기의 서당,

경주 두산서당(慶州 斗山書堂)을 찾았습니다.

 

경주 두산서당(慶州 斗山書堂)은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604호로 지정 되었으며,

 

 

 

서당(書堂) 앞에 있는 안내문에서 두산서당(斗山書堂)의 배치도를 먼저 살펴 봅니다.

 

 

 

서당(書堂)의 동쪽 끝에는 각각 3칸규모의 관리사가 "ㄱ"자 형태로 2동이 있어,

규모는 비슷한 크기이나 각각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서당(書堂) 앞으로는 송전리 마을과 마을앞 너른 들판이 내려다 보이고,

 

 

 

관리사에서 서당 입구에는 문옹공(汶翁公) 14세손의 비석이 있고,

 

 

 

두산서당(斗山書堂)은 일반적으로 보아오던 서당(書堂)의 개념을 넘어서,

거의 서원에 가까운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는곳으로 강학공간 부터 살펴 보자면,

 

 

 

두산서당(斗山書堂)은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문을 닫아 두어 담장너머로 들여다 보아야 하는데,

 

 

 

두산서당(斗山書堂)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진에 참여하여 크게 활동한 김석견(金石堅) 등 4부자의 충절을 기려,

경주 지역 사림들이 1798년(정조22)에 두산별장의 자리에 창건한 두산사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1872년(고종9)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19년에 중건되면서 두산서당으로 편액 되었으며, 후손들에 의해 개보수 및 증축이 이루어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강당인 경의당(景義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강당의 중앙의 마루에는 두산서당(斗山書堂)의 현판과,

몆개의 기물이 있으며 안쪽에 경의당(景義堂) 현판과,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편액도 보입니다.

 

 

 

두산서당(斗山書堂)은 1919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나머지는 근년에 새로 짓거나 개축한 건물들 이며,

전체적으로는 서원(書院)의 틀을 갖추고 있으며 배치형식과 건물구성은 조선 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중 강당인 경의당(景義堂)은 조선후기적인 양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 입니다.

 

 

 

경의당의 안쪽 동편에는,

3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곳인 동재(東齋)가 있으며,

 

 

 

경의당(景義堂)의 마당에는 노거수 배롱나무가 있어,

배롱나무꽃이 한창인 여름철에는 풍취가 뛰어날것으로 생각 됩니다,

 

 

 

강당과 사당 사이에는 1칸 크기의 작은 건물인 전사청(典祀廳)이 있어,

 

 

 

이곳도 문이 닫혀있어 들여다 볼수는 없지만 전사청(典祀廳)의 현판이 걸려 있어,

 

 

 

맞배지붕의 아담한 전사청(典祀廳)은,

명칭으로 보아 제사 음식을 준비하거나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여겨 집니다.

 

 

 

전사청의 서편에는 제향공간이 있어,

 

 

 

삼문을 두고 안쪽에 사당인 상절사(尙節祠)가 있어,

상절사(尙節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여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세운지 그리 오래지 않아 보입니다.

 

 

 

두산서당(斗山書堂)의 주인인 김석견(金石堅,1546~1614)은,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자고(子固) 호는 문옹(汶翁)이며 그에게는 김몽수(金夢秀)·김몽량(金夢良)·김몽남(金夢南)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용력이 뛰어나고 무예를 잘하여 당시 사람들이 "김삼몽(金三夢)"이라 불렀다고 하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47세에 세 아들과 더불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경상도 각지를 전전하면서 왜군을 공격하여 많은 적장의 목을 베고 수많은 적의 군수품과 군량미를 노획하기도 하였으며,

진중에 있을 때에는 세 아들과 가동 열 명이 무장하고 좌우에 시열하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둘째 아들은 내남면 노곡리 곽천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아버지를 대신해 창을 맞고 26세(1596년)에 전사 하였고,

이를 계기로 김석견(金石堅)은 더욱 맹렬히 토적에 주력하여 창암전투(倉巖戰鬪)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는데,

휘하 의병들이 그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려고 하였을 때 극력 저지 하였다고 전하며,

김석견(金石堅)은 왜란 뒤 훈련원정에 임명되었으나 둘째를 잃은 슬픔에 벼슬을 사양하고 양북면의 두산별장에 기거하며,

농사를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가르치다가 69세에 생을 마감 했으며 사후에 선무원종공 에 녹훈 되었습니다.

 

 

 

문옹(汶翁) 김석견(金石堅)의 애국심을 살펴볼수 있으며,

방문객이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는 곳으로,

경북 경주의 두산서당(斗山書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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