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사당 육신사(六臣祠)를 찾았습니다. 

 

육신사(六臣祠)가 있는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묘골마을로 들아가는 길목에는 충절문(忠節門)이 있어,

마치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처럼 보이나 육신사(六臣祠)는 사찰이 아닌 사당 이므로 유가에서는 이문(里門)을 지칭 합니다.

 

 

 

묘골마을 입구에는 사육신 기념관의 표지가 있어,

 

 

 

사육신 기념관은 문이 닫혀있어 보지 못하고,

 

 

 

기면관 옆에는 삼충각(三忠閣)이 있어,

조선 영조 5년(1775)에 정려(旌閭)된 충정공 박팽년(朴彭年)과,

순조 31년(1831)에 정려된 그의 아들 박순(朴珣)과 박순의 유복자였던 박일산(朴壹珊)등 3세가 정려 되었으므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경상도관찰사이던 김양순(金陽淳)이 71주(州)의 수령들에게 경비를 거두어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지어 삼충각이라 하였으며,

비각은 정측(正側) 1칸의 익공(翼工)집의 맞배지붕이며,

 

 

 

일각문을 들어서면 비각과 비석이 보이고,

삼충각(三忠閣)의 편판이 있으며,

 

 

 

비석은 전면에 순천박씨 삼세정충기실비(順天朴氏 三世旌忠記室碑)라 쓰여 있으며,

오석(烏石)으로 높이 1.7cm, 폭 60cm, 두께 30cm 이며,

홍문관교리 박승현(朴升鉉)이 찬(撰) 하였습니다.

 

 

삼충각을 나와 묘골마을과 보물 문화재인 태고정(太古亭)을 돌아보고,

육신사(六臣祠)로 들어 가면서 건물의 배치를 살펴 봅니다.

 

 

 

육신사(六臣祠) 의 외문인 솟을삼문이며,

 

 

 

외삼문의 왼편에는 송덕사(頌德辭)의 비가 서있고,

 

 

 

외삼문을 들어서면 육신사(六臣祠)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외삼문 안에는 선비사상을 보여주는 장방형의 연지가 있고,

 

 

 

계단을 오르면 홍살문이 있어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며,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붉은 문으로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의미 이기도 합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숭절당(崇節堂)이 있어,

숭절당의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고,

 

 

 

숭절당(崇節堂)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一"자 형의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건물이며,

 

 

 

숭절당(崇節堂)는 제사를 위한 재실 건물로 제사를 위한 제구들을 보관하는 전사청과,

제사준비를 위한 사람들이 머무는 용도로 지어 졌습니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사육신(死六臣)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비가 세워져 있어,

육선생 사적비는 사육신의 생애와 사적을 음각한 비로 거북 6 마리가 받치고 있는 육각의 비로,

1979년 육선생사적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고 하며,

 

 

 

축대 아래에는 박정희 전대통령 휘호(揮毫)와 최규하 전대통령 휘호(揮毫),

박준규 전국회의장 휘호(揮毫)가 차례로 자리해 있습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인 성인문(成仁門)은 닫혀 있으나,

 

 

 

우측 담장을 따라 사당의 옆면에 있는 협문으로는 들어갈수가 있어,

 

 

 

육신사의 중심되는 제향 공간인 숭정사(崇正祀)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웅장한 규모이며,

 

 

 

숭정사(崇正祀)의 현판으로,

이곳에 육신사(六臣祠)의 현판이 아닌 숭정사로 되어 있는것은,

사육신과 더불어 박팽년의 부친인 중림(仲林, ?~1456년)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어서 라고 하며,

 

 

 

사당에는 조선 세조 때 단종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浮)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육신사(六臣祠)의 유래를 살펴보면,

지금 삼가헌이 있는 묘골에서 500m 가량 떨어진 하빈면(河賓面) 묘리(妙理) 마을 삼가헌(三可軒) 근처에서 ,

자손들이 뜻을 모아 절의묘(節義廟)란 사당을 세우고 박팽년과 그의 아버지 중림(仲林)의 신위를 모시고 제(祭)를 지낼 무렵에,

박팽년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고조부의 제삿날에 꿈을 꾸었더니,

꿈 속에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 5명이 사당 밖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고,

직계 후손 없이 멸문지화(滅門之禍) 당한 것을 안타까이 여겨서 다섯분의 제물도 함께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다가,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며 서원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들은 숙종이 1694년 낙빈서원(洛濱書院)이란 이름의 사액(賜額)을 내려 주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폐쇠된 것을 박정희 전대통령의 "충효위인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묘골에다가 육신사(六臣祠)를 짓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합니다.

 

 

 

충의사(忠義祠) 앞에는 문민공한석당 박선생 유적비(文愍公 閒碩堂 朴先生 遺蹟碑)가 있어,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아버지 박중림(朴仲林, ?~1456년)의 유허비이며,

 

 

 

충의사로 들어가는 사주문 이며,

 

 

 

충의사(忠義祠)는 박팽년의 부친인 박중림(朴仲林)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974년 건립 하였으며,

박중림(朴仲林, ?~1456)의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한석당(閑碩堂)으로,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427년 문과중시에 급제해 집현전수찬이 되었고,

그뒤 시강원보덕·사간·승지·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452년(단종 즉위)에 공조참판이 되었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수문전대제학·대사헌·예문관대제학·공조판서·집현전제학 등을 거쳐 1453년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1455년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세조의 회유를 물리치고 벼슬에서 물러 났으며,

이듬해 아들 팽년과 집현전 제자들이 일으킨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능지처참 당했습니다.

이때 박팽년은 물론이고 인년·기년·대년 등의 아들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1739년(영조 15) 신원이 되어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784년(정조 8) 좌찬성이 추증 되었고 장릉(단종의 능) 충신단에 배향되었으며,

공주 동학사숙모전(肅慕殿)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 입니다.

 

 

 

묘골마을과 육신사(六臣祠)가 존재할수 있게 된것은 사육신 중 후손으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박팽년 손자 박비(朴婢)가 있어서 인데,

계유정란(癸酉靖難) 무렵 박팽년의 아버지 중림(仲林)과 그의 4형제는 물론 그의 아들 3형제인 헌(憲), 순(珣), 분(奮)과 육신(六臣)의 손자들까지,

삼대가 모두 처형되어 멸족(滅族)의 참화를 당하고 아녀자들은 공신의 노비(奴婢)가 되거나 관비(官婢)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무렵 박팽년의 둘째 아들 순(珣)의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도 관비(官婢)가 되어 고향인 경상도 닭밭골로 내려와 살았는데,

집의 몸종과 함께 임신 중였으며 그후 이씨 부인은 아들을 낳고 몸종은 딸을 낳았는데,

당시 세조는 역적의 후손된 남자는 누구나 죽이라 하여서 외할아버지가 이를 감추기 위해서 아이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고,

비밀리에 여종이 낳은 딸과 바꾸어 길러서 기적적으로 사육신 중 오직 하나 박팽년의 혈손(血孫)만이 남아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박비(朴婢)가 17세 되던 해에 이곳에 부임해온 이모부인 경상도 관찰사 이극구(李戟均)의  권유 따라 자수하여,

성종(成宗)으로부터 사(赦)함을 받고 박비(朴婢)는 종의 이름이어서 나쁘다 하여 박일산(朴一珊)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아 고향에 내려오게 되었고,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朴一珊)은 후손이 없던 외가의 재산을 물려 받아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99간의 종택(宗宅)을 짓고 정착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경상도 달성군 하의면 묘골은 순천 박씨 박팽년 후손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후 묘골에는 구한 말까지 300여 호가 살았고 광복까지만 해도 100 여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30 여호만이 남았습니다.

 

 

 

계유정란(癸酉靖難)후 237년이 지난 숙종17년(1691년)에,

나라에서 사육신의 신원(伸寃)을 풀어주어 옛관직을 복위시켜 사육신(死六臣)의 넋을 위로 하고,

그 무렵부터 사육신(死六臣)을 만고충절(萬古忠節)의 표본으로 기리게 되었으며,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박팽년(朴彭年)의 손자 박비(朴婢)의 묘골마을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대구 달성의 육신사(六臣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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